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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03. 2017

톨스토이의 충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다." - 톨스토이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90km 떨어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는 톨스토이의 고향이다. ‘밝은 숲속의 초지’라는 뜻에 어울리게 자작나무 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타나는 2층짜리 흰색 목조주택이 바로 톨스토이 생가다. 그의 서재에는 2만 2천 권의 책이 있다. 러일 전쟁이 터지자 80세 나이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10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평생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톨스토이 생가로 가는 길

미국 프린스턴 대학 문예 창작과 교수인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1967~) 는 ‘축복받은 집’이란 책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벵골 출신 인도인으로 런던에 이민 가서 그녀를 낳았고 줌파가 두 살 때 다시 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뒤 정착하였다. 어머니는 벵골어를 사용하였고 줌파는 영어를 사용하였다. 그녀에게 두 언어는 언제나 낯설었다.


보스턴대 박사과정 시절 그녀의 논문 주제는 르네상스 건축과 문학이었다. 1994년 이탈리아 피렌체를 방문하였을 때 처음 이탈리아어를 접하였다. “전혀 모르는 언어였는데, 벼락에 맞은 느낌이었다.” 이탈리아에 살아 본 적도 없고 친구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이탈리아어에 대한 열망이 솟아올랐다. 익숙한 언어인 영어로 작품을 써서 퓰리처상까지 받았지만, 그녀는 자유를 원했다. 2015년 이후 그녀는 영어로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40편의 작품을 썼다.

줌파 라히리

그것은 그녀가 좋아한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의 조국 아일랜드는 800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끊임없이 저항하였다. 게일어를 쓰는 아일랜드에서 영어는 제국의 언어였다. 베케트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프랑스에 귀화하고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롯한 소설과 희곡을 프랑스어로 발표하였다. 베케트는 왜 프랑스어로 쓰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문체 없이 쓸 수 있으니까. 엄청난 자유가 그 안에 있다.” 영어로 글을 쓰면 분명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습에 젖은 익숙함이 싫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나오는 문체를 버리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어는 서툴고 부족하지만 익숙함은 없었다. 꽃은 활짝 핀 순간이 아니라, 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가장 아름답다. 베케트에게 프랑스어는 모험이고 도전이었지만, 가슴은 순수하였고 신선하였다.


화가 중에 익숙한 오른손으로 그리던 것을 멈추고 왼손으로 그리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작품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분명 왼손보다 오른손이 훨씬 잘 그린다. 붓을 다루는 데도 능숙하고, 자기 표현하는 데도 유리하다. 그러나 오른손은 자기도 모르게 틀에 얽매어 신선함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한다. 작품을 빨리 만들어 팔려는 상업적인 생각이라면, 오른손으로 그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과 도전을 가진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여 자기를 갈고닦아 갈 것이다.


낯선 언어로 작품활동을 하는 줌파 라히리나 사무엘 베케트는 도전정신으로 가득 찬 작가이다. 물론 그들은 천재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글을 쓰고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은 경이롭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학구열이다.


배우려는 욕구는 인간만이 가진, 가장 인간다운 특징이다. 호기심 때문에 인류 문명이 발전해 왔다고 한다. 만일 인간에게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없다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배우려는 욕구는 겸손함을 전제로 한다. 배우는 사람은 말보다는 듣기에 열심이다. 상대를 스승으로 여기는 열린 마음은 곧 겸손함이다.


돈이 있고 힘이 있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머리를 숙인다. 배울 것이 있어서 고개를 숙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가 가진 힘과 자리 때문에 고개를 숙이는 경우도 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모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그런지는 따져봐야 한다. 그가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자리도 없고 나이 들어 은퇴해도 주변에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올 것인가? 혹시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외로움에 시달리지 않을까? 고장 난 녹음기처럼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면, 좋아할 사람은 없다. 나이 들었다고 대접해 주는 것도 하루 이틀뿐이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보았자 신선한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는 뒷방 노인네가 된다.  대학 다닐 때 10년도 넘은 강의안을 들고 와서 읽어주는 교수가 있었다. 모두 무능 교수라고 뒤에서 욕을 하였다.


가끔 교수들이 발표하는 컨퍼런스나 포럼에 참여한다. 그럴 때마다 후회가 찾아 온다. 교수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써온 논문을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읽어준다. 무슨 시 낭송회도 아니고, 시각 장애인도 아닌 데, 종일 교수들의 논문 발표를 들으면서 시간 낭비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차라리 나누어 준 논문은 집에 가서 읽어보면 될 줄로 압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는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입말로 중심 논제를 직접 설명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발표자의 강조점과 감정을 그대로 느낀 후, 그 논문을 읽으면 얼마나 생생할까! 공부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비록 목사나 교수라 할지라도 그들의 고리타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별로 없다. 나이가 들어 지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젠 배우지 않겠다고 하면, 그것은 곧 무덤을 파는 행위다. 망각이란 바이러스가 우리를 괴롭힐 때 배우지 않겠다는 생각은 곧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젊었을 때보다 노인이 되어서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딱히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철철 넘쳐나는 시간에 책을 읽고 공부하여야 한다.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서 한 마디 물어 볼 때 용암이 분출하듯 그동안 공부했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며 그순간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풍부한 인생 경험과 겸손하게 공부했던 그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유용한지 발견할 것이다. 요즘 사회에 존경받는 원로가 없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공부하는 어른이 없다는 뜻이다. 맨날 하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노인은 많아도 젊은이들의 사고를 뛰어넘는 지혜를 갖춘 노인은 드물다.


뒷방 노인네가 되지 않기 위해서만 공부하자는 말은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와도 바른 관계를 맺고 리더십을 갖추려면, 겸손하게 눈과 귀를 여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책을 읽는 사람만이 진정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다.


- 사족, 蛇足

기쁨은 진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에 있다. 목사로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난 기독교 근본주의가 싫다. 이미 진리를 다 가진 양, 이제는 배우지 않아도 되는 양, 말하고 행동하는 근본주의가 싫다. 눈을 열어 책을 보지도 않고, 귀를 열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오직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가 싫다. 겸손함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누가 틀렸다. 누가 틀렸다.” 정죄하기에 빠른 근본주의가 싫다. 배우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는 듣기 싫다. 마음을 열고 눈과 귀를 여는 사람은 누구라도 존경하며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내가 따르고 싶은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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