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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11. 2017

마음의 상처, 치유할 수 있다!

화가 김정욱과 아르테미시아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 (Vulnerant omnes, ultima necat)

이 글은 프랑스 바스피레네 지방 위레뉴(Urrugne)교회 한편에 있는 해시계에 새겨진 문장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 답답해지는 문장이다. 왜 이런 글을 교회에 그것도 해시계에 써 놓았을까? 1)

김정욱의 그림

화가 김정욱(1970~)은 덕성여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녀가 서양화보다 동양화에 매력을 느낀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다. 서양화는 요즘 말로 뽀샤시 처리가 된 매끈한 미녀들을 주로 그린다면, 조선 인물화는 그림을 보고 당시 앓았던 피부병까지 분석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상세하다. 우리나라 말에 얼굴이라는 말은 원래 ‘얼’(영혼)이 드나드는 ‘굴’(통로)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 화가는 얼굴을 통해서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얼굴에 난 상처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기품은 마마나 수두 같은 질병으로 얼굴이 얽었어도 문제 되지 않는다. 굳이 가리거나 미화할 필요가 없었다. 


화가 김정욱은 상처를 담고 있는 얼굴 주로 그린다. 김정욱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모든 사람의 역사이면서 개인의 역사다.”

그림 속 얼굴은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주제에 따른 상황 설정이 아니고 한 개인의 전체적인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화가는 세상의 비밀이나 이치에 대해 생각하는 직업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세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녀는 상처가 있는데도 숨기고 없는 것처럼, 받지 않은 것처럼 숨기는 현대인을 꼬집고 있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말하였다. 

“감출 수 있는 고통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진짜 고통은 숨길 수 없다.”(Levis est dolor qui capere consilium potest et lepere sese: magna non latitant mala.)2)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1)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기 여성 화가다. 화가인 아버지는 그녀에게 재능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림 공부를 시켰다. 17세기 까지만 해도 여류화가는 드물었다. 미술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어떤 아카데미에서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친구이자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에게 미술 교육을 부탁했다. 여기서부터 비극은 시작하였다. 타시는 그녀를 성폭행하였다. 18살 그녀는 타시를 강간 상습범으로 고발했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피해자인 그녀는 오히려 부도덕한 여자로 오해받고 온갖 구설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성폭행당했다고 주저앉지 않았다. 그녀는 후일 한 고객에게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란 작품을 남겼다. 유디트는 이스라엘의 왕비로,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목을 베어 죽였던 영웅이다. 구약 외경 유딧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많은 화가의 주제였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루벤스 등 당대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유디트를 그렸다. 대부분 가녀리거나 매혹적인 모습으로 그녀를 그렸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오히려 남성적이다. 그녀의 팔뚝은 웬만한 남자를 제압할 만큼 힘이 넘치고 표정은 결연하다. 머리통을 고정한 채 칼을 정확히 목 안쪽에 댄 그녀는 마치 요리사 같다. 그녀는 유디트 얼굴에 자신을, 적장 홀로페르네스 얼굴에 성폭행범 아고스티노 타시를 그렸다. 그녀는 일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렇게 상처를 드러냄으로 그녀는 오히려 상처를 치유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오늘날 많은 비평가와 학자에게 재발굴되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페미니즘 화가로 불린다. 3) 


상처는 언제나 있다. 그러나 잘 치료하면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 문제는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고 병을 키우는 경우다. 허리가 90도로 구부러져 걷는 데 불편하여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권사님이 계신다. 한번은 “힘드시지요?” 하고 말을 걸었더니 허리 구부러진 사연을 이야기했다. 젊었을 적 자식을 키우느라 거리에서 행상을 하였다.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삶이었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허리가 욱신거렸지만, 보상금만 약간 받고, 돈 버는 것에 급급하여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 후 통증이 있을 때마다 진통제 몇알로 버텼는 데, 이제는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감정적인 상처도 마찬가지다. 빨리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지만, 숨겨두고 버려두면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는 깊어진다. 감정의 상처, 정신적 상처, 영혼의 상처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 받지 않는다. 대부분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에게 받기에 더욱 아프다. 어렸을 때 부모에게 사랑을 받으며 배우는 교훈이 신뢰다. 부모를 신뢰함으로 주변 사람을 신뢰하는 것을 배운다.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교훈이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사랑을 주지 않거나, 일관성이 없으면, 부모를 신뢰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부모, 당연히 사랑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신뢰를 배우지 못하면, 아이는 매사 조심하게 되고 끊임없이 상대방을 의심하게 된다. 그는 신뢰보다 의심을 먼저 배웠다. 후일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신뢰보다 의심을 하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는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고립시킨 후에는 외로워 몸서리친다. 그리고 외롭기에 다시 사람을 찾는다. 악순환은 그렇게 반복한다. 


어렸을 때 신뢰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불행의 싹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상대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받으려 한다. 세상 어디엔가 그런 사람이 있을 거란 허망한 기대를 가진다. 그러면서도 막상 누군가 그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면, 오히려 불안해하고 끊임없이 의심한다. 단순한 의견 차이나 사소한 반대조차도 당황함이나 부정적 반응으로 나아간다.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상처받기 쉽다는 뜻이다. 


당신이 들어갈 때 친구가 전화 하던 것을 중단하면, 그가 당신 이야기를 했다고 확신한다. 다른 세 명의 친구가 점심시간에 같이 앉아 웃고 있으면, 그들이 당신을 비웃었다고 짐작한다. 날카로운 감각과 시선으로 정보를 모으고 사실을 검토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입관이다. 비뚤어진 선입관은 모든 것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정보나 증거나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한다.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벧전1:13)

상상력은 창의적이다. 과학자의 상상력은 기술 혁신을 가져오고, 작가의 상상력은 위대한 작품을 만든다. 상상력을 잘 사용하면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그 피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부정적 상상력은 남의 말이나 행동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스스로 상처받고 아파한다. 


흔히들 상처받았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정말 상대방이 그에게 상처를 주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대방은 전혀 그런 의도나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했는데 스스로 상처받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 그가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과 말이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에 상처받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게 정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어쩌면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스스로 상처받고 아파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다.(Therefore, prepare your minds for action; be self-controlled; set your hope fully on the grace to be given you when Jesus Christ is revealed.벧후1:13, NIV) 잘못하면 우울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 있다. 남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면, 화가 김정욱이나 아르테미시아처럼 그림으로 표현하라. 그림도 그릴 수 없다면, 종이 위에 자신의 아픔을 자세히 적어보라. 이도 저도 아니라면 누군가를 찾아가 말을 하라. 믿고 말할 상대가 없다고 하소연하지 마라. 인간은 모두 연약하다. 온갖 화장으로 숨기고 가리지만 인간은 허물 많고 상처 많은 존재다. 나의 아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것이다. 아프다고 손 내미는 것은 곧 상대방을 신뢰하겠다는 의사표시다. 손도 내밀지 않는데 손 잡아줄 사람은 없다. 


과거가 나를 아프게 한다면, 부정적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다. 잘 생각해 보면 좋았던 것, 즐거웠던 것, 기뻤던 것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것이 없다고? 기억하기 싫어서 잊어버렸을 뿐이다. 기억의 창고를 뒤지고 뒤져 찾아내보라.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무언가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 준 좋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생각과 믿음은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 의도적으로 생각을 바꾸면 우리의 신체도 의도적으로 변할 수 있다. 상상력의 힘은 무한하다. 파괴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창조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삶을 복구하라. 물론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그 흔적은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벧전1:13)


주(註)

1) 한동일, 라틴어 수업, (서울 : 흐름출판, 2017)

2) 이진숙, 미술의 빅뱅, (서울 : 민음사, 2010)

3) 고바야시 코즈에, 로마 천년의 지식사전, 송수영 옮김, (서울 : 밀리언 하우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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