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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r 30. 2017

공간은 행복이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아버지는 임진각에 가셨다. 연세가 드시면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한 발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고향 땅.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나 남쪽에서 사신 세월이 몇 곱절 되는데. 아버지는 태어나서 자라난 고향 땅 평안남도 중화군 남창리를 잊지 못하셨다. 명절 때면 아침만 드시고 조용히 자리를 뜨신다. 온종일 임진각 철망 앞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다 오신 아버지는 지치고 피곤하신지 아무 말도 없이 잠자리에 드셨다. 아버지에게 고향은, 임진각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거기서 텅 빈 가슴 한구석을 채우고 오셨을까? 아니면 텅 빈 가슴을 더 허전하게 만드셨을까?

아버지가 마음 쓰신 장소가 하나 더 있다. 서재다. 아버지가 서재에 들어가면 어린 우리는 놀다가도 조용해야 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쉿”하며 신호를 주었다. 아버지는 책을 읽고 공부하고 글 쓰는 시간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 시간과 장소가 아버지의 서재였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평안을 얻고 위로를 얻고 힘을 얻는 듯싶았다. 어린 내게 아버지의 서재는 신비하고 신성한 장소였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책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아신 아버지는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책을 보관하는 법, 정리하는 법, 책의 겉표지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아버지는 삶으로 나에게 서재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다. 서재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이요, 마음의 평안을 얻는 곳이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돈이 생기면 우선 책을 산다. 그러고도 남으면 음식과 옷을 산다.” 나 역시도 돈이 생기면 책을 샀다. 그리고도 남으면 또 책을 샀다. 대학 다닐 때 점심값을 아껴서, 때로 점심을 걸러가면서 책을 샀다. 어느 순간 쌓을 곳이 없도록 책이 많아진 것을 발견하였다. 이사할 때면 이삿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러 온 청년들이 말했다.

“이 책 다 읽으셨어요?”

미국의 성직자 토머스 엔트워스 히긴스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는 책꽂이가 부족해 목수를 불렀다. 목수는 그에게 말했다.

“정말 이 책들을 다 읽으셨어요?”

그는 목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도구 상자에 있는 도구를 다 쓰시오?”

물론 아니다. 도구란 나중에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서재 역시 읽은 책만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를 대비하는 공구 상자에 더 가깝다. 얼마 전 서재를 옮기면서 본의 아니게 책을 두 곳으로 나누게 되었다. 고민이었다. 어떤 책을 가지고 가고 어떤 책을 두고 가야 할까? 그제야 나에게 정말 필요한 책, 두고두고 읽을 책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두고 오는 책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마음 정리를 하였다. 서재가 아버지에게 의미가 있듯이 나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는 토요일마다 광화문 교보 서점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 그 아이들도 아버지처럼 그리고 나처럼 책을 사랑하는 아이가 되기를 소망해서였다. 유치원 들어갈 때부터 아이들과 함께 서점에 가서 몇 시간씩이고 놀았다.

“딱 두 권만 골라라.”

아이들은 신이 나서 서점의 책을 꺼내 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사준 책이 천 권은 넘었다. 책을 산 후 광화문 생선 골목에 가서 삼치구이 하나 시켜주면 아이들은 만족이었다. 교보문고와 삼치구이 집은 어느새 우리에게 의식이 되었다. 지금은 모두 해외에 나가 공부하지만, 때때로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웃곤 한다.

살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있다. 삶의 의욕도, 사람을 만나고 싶은 생각도 다 사라질 때 나를 회복시켜 주는 곳은 서재밖에 없다. 피곤하고 지칠 때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집어 든다. 소파에 온몸을 기대어 앉아 책을 본다. 그것도 힘들면 그냥 사진작가의 두툼한 사진집을 꺼내 들고 뒤적거린다. 서재는 영혼의 안식처이다.


대학 시절 나는 일주일에 몇 번씩 서점을 들렀다. 응암동 헌책방 골목은 자주 가던 곳이다. 얼마나 자주 갔는지 어느 책이 어디 꽂혀 있는지 주인보다 더 잘 알았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광화문 말씀사와 성바오로 서원을 자주 찾아갔다. 광화문 말씀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넓찍한 공간에 꽂혀 있는 책을 하나씩 빼서 목차를 살펴보고, 저자 소개나 머리말을 읽어보며 살지 말지 고민하였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그 시절 신간 서적을 살 꿈은 꾸지도 못했다. 그냥 책 구경만 하다 머쓱해서 나갈 때는 급한 일이 있는 듯 뛰어나가곤 하였다.

광화문 MBC 사옥 옆 성 바오로 서원도 자주 가던 곳이다. 지금은 카페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자그만 서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예배당이 있었다. 내가 마음을 두었던 곳은 바로 그 예배당이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강단만 은은하게 빛을 비추고, 그 빛이 비정형의 돌들을 은은하게 비추어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공간이다. 조용히 하나님을 찾고 싶은 공간이다. 부채꼴 모양의 좌석에는 언제나 한두 명이 조용히 기도하였다. 복잡한 세상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분주히 살다가 경건한 공간에 들어서면 어느새 마음은 치료되고 회복된다.


개신교인으로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교회에 이런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라도 찾아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없다. 소리 내서 울부짖으며 기도할 때도 필요하지만, 조용히 침묵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건축가 승효상 씨는 건축이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의 책 ‘건축, 사유의 기호’에 이런 글이 있다.

1960년 윈스턴 처칠이 ‘타임’지와 회견하면서 말하였다.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

바꿔 말하면 좋은 건축은 좋은 삶을 만들지만 나쁜 건축은 나쁜 삶을 만들 수밖에 없다. 승효상 씨는 건축을 이야기하였지만, 나는 공간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공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떤 공간은 온갖 지저분한 것으로 가득 차서 마음이 심란해지고 울적해진다. 어떤 공간은 어두침침하여서 사람을 불안케 만든다. 그러나 어떤 공간은 마음이 편해져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싶은 곳이 있다. 어떤 공간은 상처받은 마음이 치료되고 회복되는 경험을 한다. 어떤 공간은 지친 영혼이 힘을 얻고 위로를 얻는다.

나만의 공간, 위로와 힘을 얻는 공간을 만들어 보자! 딱히 특별한 공간이 없다면 조그만 앉은뱅이책상 하나를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보자! 작은 책상은 책을 읽으며 선현들을 만나는 공간이고, 나를 돌아보는 공간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어보자.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고 오직 만남을 위한 책상으로 사용하자. 그렇게 그 작은 책상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곳은 어느새 나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공간으로 바뀔 것이다. 집안에서 그런 공간을 찾을 수 없다면 가까운 교회, 도서관, 카페를 찾아보아도 좋다. 영혼의 안식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공간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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