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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08. 2017

키에르케고어의 행복론

공자, 노자, 장자, 예수의 행복론

젊은 시절, 무더운 여름 슬리퍼를 신고 교회 왔다가 야단을 맞은 여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디 감히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는 데 슬리퍼를 찍찍 끌고 오느냐!”

우리는 그게 부당한 야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운 데 슬리퍼 신고 올 수 있지 않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어르신들 말씀에 예전에는 여자 교우들이 파마도 못 했고, 립스틱도 바르지 못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파마나 립스틱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이 왜 이렇게 바뀌는 것일까요? 시대의 변화를 따라 생활 규범이 바뀐다면 그건 절대적이지 않다는 뜻이지 않나요?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절대적 규범이나 규칙이라는 게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요? 기성세대는 자기들 문화라는 잣대로 젊은이들을 보면서 ‘쯧쯧’ 혀를 차는데 그건 성경적 기준인가요? 아니면 세상적 기준인가요?  


펜실베니아 뉴웰링턴에 가면 재세례파의 한 분파인 아미시 교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독특한 삶의 방식 때문에 영화에 가끔 나오기도 하지요. 남자들은 차양이 넓은 검정 모자를 쓰고 다니며, 장식이 거의 없는 검은 양복을 입습니다. 그들은 검소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과학기술을 거부합니다. 마을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교통수단으로는 조그마한 상자처럼 생긴 검은 마차를 이용합니다. 이들의 생활 규범은 엄격하기로 유명하지요. 


그들의 신앙 선배격인 스위스 형제단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17세기 말, 제이콥 암만(Jacob Ammann)은 나이 많은 장로였던 한스 리스트(Hans Reist)가 거짓말한 여성을 훈계하지 않고 지나친 관용을 베풀었다고 혹평했습니다. 한 사람의 거짓말을 묵인해주면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하게 될 거라는 이유에서지요. 그는 교인들을 선동해서 한스 장로를 공동체에서 추방해 버렸지요. 그는 사람들의 복장도 지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검소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자들은 수염을 다듬으면 안 되는 데, 이는 남들에게 멋있게 보이려는 욕심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옷에 단추도 달지 못하게 했는데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지요. 이러한 엄격한 삶의 방식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아미시 교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 정통 보수 장로 교단에서는 한때 주일날 차를 타면 안 된다고 가르쳤지요.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사 먹는 것도 금지하였지요. 형태는 다르지만 지금도 보수적인 교단은 젊은이들과 수시로 충돌을 일으키곤 합니다. 전도사 시절 청년들이 예배당에서 기타를 쳤다고 야단을 맞곤 했습니다. 술집에서나 사용하는 악기를 어찌 감히 예배당에서 칠 수 있느냐는 이유였지요. 이런 보수적인 시각은 새로운 문화에 비판적이고 한 세대 전 문화를 고수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요. 도대체 기성세대들이 들이미는 보수적인 규범은 누가 만든 것이고, 언제 바뀌나요. 언제나 시대를 한 50년쯤 뒤처져 따라가면서 많은 충돌과 갈등을 겪은 후에야 겨우 바뀌곤 하지요. 기성세대의 규범은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걸까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많은 규범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곤 하였지요. 그들은 성경에서 이런저런 규범들을 찾아내고 만들었지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규범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마구 깨트렸습니다. 안식일 날 사람을 구해주는 가 하면, 제자들이 이삭을 훑어 먹는 것도 묵인하였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하다고 여기는 문둥병 환자나 거지를 기꺼이 끌어안았습니다. 이방 여자와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문화가 가지고 있는 규범을 무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짊어지기 힘들어하는 규범을 만드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오히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충돌은 불가피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도 이런 문제로 여전히 갈등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행복하기 위해 인간은 덕을 갖춰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덕을 갖추려면 우주의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주의 질서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해는 언제나 정해진 시각에 뜨고 예상된 시각에 집니다. 자연의 질서를 지켜야 하듯이 사회 규범과 질서를 잘 지켜야 인간관계가 편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공자는 주장하였지요. 


반면에 노자나 장자같은 도교 사상가들은 전혀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그들은 사회 규범을 따르는 것 보다는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하였지요. 장자는 강을 헤엄쳐 건너려는 자의 비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려고 하면 강을 건너기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장자는 물살이 셀수록 거스르지 말고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물이 사람을 강변 쪽으로 밀어주기 때문에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물론 멀리 내려가서 도착하겠지만, 그래도 죽음은 면했잖아요. 걸어서 올라가면 되니까 별문제 없겠지요. 도교 사상은 모든 인위적인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만물과 일체가 되는 무위(無爲, inaction)를 주장합니다. 


공자가 규범대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주장하였다면, 노자나 장자는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행복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팔복이 나옵니다. 복이란 말이 9번 정도 나오는데 원문에는 언제나 문장 제일 첫머리에 ‘복’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덕과 규범을 이야기하는 공자의 사상도 따르지 않고, 모든 욕구를 버리라고 가르쳤던 노자나 장자의 사상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과연 행복하셨을까요?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로마 군인은 언제든지 강제로 일을 시켰습니다. 길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청년들을 잡아가기도 하고, 짐을 나르게도 하였지요. 높은 세금을 뜯어서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지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제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였지요. 규범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규범대로 살지 않았던 위선적 바리새인들, 정권에 아부하며 백성을 수탈하던 사두개인들의 모습을 다 지켜본 예수님은 행복하셨을까요?


예수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체 사람들을 마구 야단치고 책망만 하셨을까요? 물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셨지요. 그러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하고 멸시받던 천민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얼굴이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분노하여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은 아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부드럽게 웃는 모습, 그들을 포용하고 품어주는 모습이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욕을 받아도 예수님은 끄떡없으셨습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사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어디 있을까요? 공자나 바리새인처럼 도덕과 규범을 정확하게 지키므로 행복할까요? 노자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세속의 흐름에 신속히 적응하고 따라가면 행복할까요? 예수님의 행복은 우주 전체의 본위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실존의 삼 단계를 말합니다.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향락을 성취하는 것이 행복인 줄 생각하는 미적 단계, 윤리 규범을 지키며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책임질 줄 아는 윤리적 단계, 마지막으로 종교 윤리적 단계가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는 마지막 단계를 종교적 단계라 하지 않고 종교 윤리적 단계라 함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실존적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찾겠지만,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키에르케고어가 종교 윤리적 단계라고 말함은 신앙이란 반드시 인간 관계 속에서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우주 전체의 본위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그는 진정한 행복의 단계, 자유의 단계로 나아가고 그것은 인간 관계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이 윤리적 단계에 머물면서 자신이 완성된 그리스도인인 줄 알고 다른 사람을 헌담하고 비판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자가 아닙니다. 손가락질하는 그 사람의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이라기 보다 바리새인의 얼굴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도덕과 규범을 말할 때는 남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복을 증명하는 표시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얻게 된 행복, 평안, 기쁨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가 진정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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