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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17. 2017

아프냐? 나도 아프다.

레비나스와 칸트

여러분은 이 글을 어떻게 읽으십니까? “너만 아픈 줄 아느냐? 모든 사람이 다 아프다. 그러니 호들갑 떨지 말고 참고 견뎌라!” 혹은 “아프구나. 너의 아픔이 내게 전달돼 나의 마음도 아프구나! 우리 함께 너의 아픔을 풀어가 보자꾸나.” 여러분은 어느 쪽에 해당하십니까?


1. 너만 아픈 줄 아느냐? 


불교에서 인생은 고해와 같다고 합니다. 불안, 염려, 갈등, 스트레스, 다툼.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부정적 언어들로 넘쳐납니다. 오늘도 서로들 아프다고 소리치며, 제일 먼저 나부터 보살펴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세상은 고통만 있을까요? 사랑, 감사, 기쁨, 성취에서 오는 만족과 휴식, 보람, 건강, 가족애, 편안한 잠자리와 먹을 것. 따지고 보면 우리 주변에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쁨보다는 슬픔을, 사랑보다는 미움을, 아름다움보다는 추함을, 감사보다는 고통에 훨씬 민감할까요?

고통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고통의 문제는 인간에게 영원한 숙제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참을 인’자를 마음에 새기라고 가르쳤습니다. 인생은 원래부터 고통스러운 것이니 무조건 참고 견디라는 스토아 철학과 궤를 같이합니다. 정말 꾹 참고 있으면 될까요? 이것은 마치 죄도 없이 감옥에 갇힌 죄수가 말 한마디 못하고 수모와 고통을 견디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로마 시대나 조선 시대처럼 권세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가르칠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무조건 참으라는 가르침은 지배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 철학으로 알맞은 가르침입니다.

2. 고통에는 뜻이 있다.


칸트 같은 철학자는 고통의 문제를 조금 다른 형식으로 풀었습니다. 고통이란 결국 보다 나은 결과를 얻어낸다는 측면에서, 고통은 가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배고픔이 있어야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고, 문제가 있어야 해결하는 기쁨이 큰 법입니다. 고통이 있어야 기쁨이 배가 됩니다.


우리 신체의 고통과 아픔은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 40만 명 중 한 명꼴로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율신경 장애(dysautonomia)가 있습니다. 이들은 넘어져 상처가 나도 아픈 줄 모르고, 눈에 티끌이 들어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고통이 없기에 치료를 받지 않고 내버려 두다 마침내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고통은 건강의 파수꾼입니다.


인류가 만들어 낸 문화 역시 역사학자 토인비 말대로 끊임없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결과입니다. 만일 도전이 없다면 인류 문명은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불편함과 고통이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학문이나 예술, 심지어 정치제도까지도 아픔 없이 만들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고통이란 활동의 박차(der Stachel)라 부르며 이를 통해 인류는 진보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칸트는 고통이란,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이해하였습니다. 칸트는 인간에게 이성이 있기에 궁극적으로 좋은 결론을 만들 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정말 고통은 선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까요?

좋은 결과가 있으면 고통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고통은 좋은 결과만 만들어 낼까요?

레비나스

3. 고통에는 윤리가 있다.


젊은 시절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친구는 펑펑 울었습니다. 이제 자기는 고아가 되었다고. 고 2인데 가장이 되었다고. 나는 그 친구가 감당해야 할 아픔과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친구의 아픔을 알기에 함께 울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예배 드리러 온 권사님 중 한 분이 말했습니다. 그 권사님은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누구보다도 신앙이 있다고 인정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권사님의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권사님은 우는 친구를 크게 나무랐습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보다 훨씬 좋은 천국에 가셨고, 이제부터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먹여 살릴 텐데 뭔 걱정이냐! 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다." 난 그분의 논리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생 때지만 이게 기독교의 가르침이라면, 그런 기독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지만, 그렇다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자에게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목적과 결과만 좋으면, 현재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요?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입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가족 모두를 잃고 평생 독일엔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죽어갔던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집중하였습니다. 과연 그들을 학살한 독일인들에게 이성은 없었나요? 독일의 히틀러만이 아닙니다. 소련의 스탈린, 캄보디아의 폴 포트. 현대 여러 곳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독재권력자들. 그들의 명령에 따라 악한 짓을 한 사람들에게 이성은 무엇일까요? 대량학살의 결과로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 인류가 공감하고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는 이유로 대량학살의 죄가 없어질까요? 레비나스는 칸트적 사고방식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고통당하는 당사자에게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를 가졌던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아픔이요 괴로움입니다. 고통당하는 자에게 '고통에도 뜻이 있으니 견디라'고 말하는 것은 고문과 같습니다. 고통은 악이고 상처고 부조리의 폭발입니다. 고통받는 순간 그것은 수용 불가능하고 견딜 수 없는 아픔입니다.


레비나스는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대량학살과 독재정권의 폭력을 보면서 인간의 이성에 기댈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 아니 인간 존재 자체가 죄악 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의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쉽게 말하는 논리를 경멸하였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논리나 철학도 고통의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궁극의 목적이라고 믿는 하나님을 우리는 여전히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르쳐야 할 진리가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요?


레비나스는 답은 이렇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즉각적인 반응은 어떤 형태로든 아프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음이든, 소리 지름이든, 분노든, 눈물이든 그들은 고통을 표현합니다. 고통의 표현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아픔을 알아달라는 뜻입니다. 나를 도와달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첫 단추이고 간절한 손 내밂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고통에만 관심을 가졌지 남의 고통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레비나스는 나보다 남의 아픔과 고통을 보는 것이 인간의 윤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남의 아픔을 본다는 것은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고 그 아픔에 책임지는 것이며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윤리의 완성이요 성화된 삶(Sainteté)입니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는 봄이고 동시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은 타인의 고통에 눈 감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똑바로 보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주는 것입니다.


"그것(줌과 바침)은 마음의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입에 든 빵, 입에 가득한 빵을 내주는 것이다. 그것은 열어줌이되, 자신의 지갑을 열어주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집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레비나스


타인의 고통과 잘못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야말로 윤리의 실천이고 이 세계를 아래에서 떠받드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고통을 짊어지고 스스로 고통받는 의인이 곧 메시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 고통을 풀어주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메시아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1:6)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난당하고 아파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태도는 시사하는 바 큽니다. 기독교는 목적의 정당성에만 목을 매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이라고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말하는 지배자의 윤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기독교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종교가 아니라 바라보는 종교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당하는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당하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십자가를 지고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메시아이기를 소망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레비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메시아, 그것은 나이고, 내가 된다는 것, 그것은 곧 메시아가 된다는 것이다."(Le Messie, c'est moi, Être moi, c'est être Messie)


그러면, 나는 과연 이 고통 많은 사회에서 메시아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불행하게도 난 여전히 누가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이웃일까 두리번거리며 찾는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바리새인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아! 나는 메시아이길 원하면서 메시아의 길을 아직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이글은 강연안 교수의 글 "고통과 윤리"(서강인문논총 8, 1998)에 바탕을 두고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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