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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5. 2017

긍휼의 마음

자비와 긍휼

남북전쟁의 와중에 1863년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을 하였다. 유명한 리 장군을 중심으로 한 남군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아직 확실한 승리를 자신할 수 없지만, 노예 해방을 공약으로 내건 링컨은 담대히 선언하였다.

1. 반란 상태에 있는 남부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할 것.

2.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자제하고 적절한 임금으로 충실히 일할 것.

3. 흑인에게 연방 군대에 참가할 기회를 줄 것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남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남쪽의 흑인 노예들을 연방 군대로 편입시키려는 전략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었다. 비록 노예해방 선언을 했다고 해서 흑인의 인권이 완전히 확보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도 전세계 곳곳에 인종 갈등이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 도망쳐 나온 노예를 숨겨주는 이는 반드시 처형하도록 하였다. 함무라비 법전이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맹을 맺은 국가들은 상대방 국가에서 도망친 노예들을 반환하는 것은 일반적 의무였다. 필사적으로 국경을 넘어 탈출한 노예들이라 할지라도 노예는 노예다. 노예들은 어디를 가도 물건처럼 취급받았으며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도망쳐 나온 노예 위한 특별한 법이 신명기에 있다.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신23:15-16)

일반적으로 ‘주인을 피하여 도망한 노예’는 이스라엘 노예가 아니라 타국에서 도망쳐 온 이방인 노예에 관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노예는 7년째 되는 해를 안식년이라 해서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타국에서 도망쳐 온 이방인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압제하지 않는다면 노예들에게 이스라엘은 천국이다. 마치 북한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고자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난민들처럼 주변 나라 노예들의 꿈과 소망은 이스라엘로 도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가도 노예의 삶을 산다면 목숨 걸고 도망칠 이유는 별로 없다. 그러나 그곳에서 자유로운 삶이 보장된다면, 목숨을 걸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 법령은 주변 모든 나라와 외교적 마찰과 갈등을 일으키기 충분하다. 인권도 없는 하찮은 노예들 때문에 국제적 전쟁을 감수하고서라도 노예들을 보호해야 할까?


하나님은 국제적 갈등과 전쟁을 감수하고서라도 노예를 보호하고 압제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 이런 법령을 제정하였을까?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서 여러 차례 ‘애굽에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신6:12, 15:15, 16:12, 24:18, 22) 이스라엘은 그 근본이 노예다. 노예에서 해방된 자들이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이 근본정신을 잊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이 신명기 법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성경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긍휼(compassion)이다.


긍휼은 ‘함께 느끼다’ 곧 ‘타인의 감정을 느끼다’라는 뜻의 라틴어(compassio)에서 유래했다. 긍휼과 비슷한 단어로 자비(mercy)가 있다. ‘자비’는 두 사람 간의 힘의 불균형을 상정한다. 힘이 없거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자비를 요청한다.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달라는 의미이다. 긍휼은 상대방이 나에게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다.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가 아니라 긍휼이다.


유대교 학자 아브라함 헤셀(Abraham Heschel)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파토스 -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 -를 느꼈다고 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에 공감하고 공명했다. 애굽에서 고통 가운데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에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겼다. 그들이 죄를 지었기에 애굽에서 고통받는 것으로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그들의 아픔과 눈물에 하나님이 반응을 보이셨다.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도망쳐 나온 노예를 보호하고 압제하지 말라는 것은 긍휼을 베풀라는 것이다. 너도 노예에서 해방된 자들이니, 도망쳐 나온 노예도 너희와 같은 존재다. 따라서 위에 있는 자처럼, 권세 있는 자처럼, 가진 자처럼 행동하지 말라. 너도 노예 -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해방된 노예 - 이므로 도망쳐 나온 다른 노예들의 심정을 공감하고 공명하여서 저들에게 긍휼을 보이라는 계명이다.


신약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모두가 죄인 -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받은 죄인 - 이므로 세상 사람들을 손가락질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정죄하지 마라.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보일 태도는 긍휼뿐이다. 자비가 아니다. 적선하듯 조금 선행을 베푸는 자비가 아니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인 양 용서를 베푸는 자비가 아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훌륭한 사람인 양 큰맘 먹고 그들을 품어 안는 자비가 아니다. 신자나 불신자 모두가 죄인이다. 그러므로 자비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단어이고, 긍휼은 똑같은 죄인인 우리가 사용해야 할 단어다.


요즘 한국 기독교는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이것 저것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자신은 거룩한 신앙인인 양, 정직하고 바른 신앙생활 하는 양 세상을 향하여 비난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은 긍휼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똑같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긍휼이다. 긍휼은 말로만 하고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긍휼은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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