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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7. 2017

회개와 용서

건축가 승효상의 예수

건축가 승효상 씨는 그의 책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돌베개, 2016)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33년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30년간의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고 3년간 메시아로서의 삶만 자세히 기록하였다. 2,000여 년 전 서른 살이면, 그 당시 사회적 정황으로 볼 때 한 인간으로서 일가를 이룰 만큼 완성된 나이다. 그때까지 직업 없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임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13:55)

가문의 직업이 계승되는 것이 일반적 상황이므로 예수님 역시 목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목수로 번역한 헬라어는 τέκτων(tektōn)이다. 텍톤은 어떤 형상을 짜고 구축하는 일을 뜻하는 것으로 건축가의 영어인 ‘architect’에 쓰였다. ‘arch’라는 접두사는 으뜸이라는 뜻이니, 으뜸이 되는 텍톤은 집을 짓는 자라는 의미이며 곧 건축가란 말과 연관된다. 건축가라는 뜻의 ‘architect’에 정관사를 붙여 ‘the Architect’라 하면 조물주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생뚱맞은 목수가 아니라 집을 짓는 건축가였다는 게 승효상 씨의 주장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건조한 땅으로 나무가 자라기 힘들다. 반면에 석회암은 이스라엘 온 땅에 널려 있어 일반인이 집을 지을 때는 돌로 집을 지었고, 솔로몬의 왕궁처럼 부유층이 집을 지을 때는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수입하여 지었다.


예수님을 건축가로 해석한 승효상 씨는 좀 더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 당시 서른 살 건축가는 완숙하였을 것이고 예수님은 영민하였기에 건축가로서도 성공하였을 게다. 그러니 건축이 사람의 삶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한 가정의 집을 짓는 일을 그만두고 모든 사람의 삶을 바꾸기 위하여 과감히 건축가의 삶을 포기하였다. 그는 더 큰 건축을 하고 싶었다. 예수님은 세상을 아예 새롭게 짓는 일을 하므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건축가(the Architect)의 길을 걸으셨다.

승효상 씨가 건축한 퇴촌주택

승효상 씨의 이야기는 내게 영감을 주었다. 예수님은 파괴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 세우고 회복시키고 새롭게 하려고 오신 건축가다. 예수님은 정복자가 아니라 해방자시다. 예수님은 비판자가 아니라 치유자시다.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손가락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


죄가 심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한다. 죄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구조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단계로 이끌어간다. 성경은 결코 죄의 문제를 가볍게 처리하지 않는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죄에 대하여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구약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많고 다양하다. 인간의 밑바닥을 다 보여주었다. 개인의 죄만 아니라 사회의 죄, 국가의 죄도 있다.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 예루살렘의 죄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미1:5)

이스라엘은 총체적으로 병들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멸망하였다. 죄 때문이다.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 데 그때 사람들의 모습을 설명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2-4)

바빌론에 멸망한 이스라엘이나, 바울 시대의 모습이나, 오늘 이 시대의 모습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인간은 모두 죄의 속박 아래 신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책이 무엇일까? 지적질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남의 죄를 문제 삼고 거친 욕을 일삼는 것이 정당할까?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너는 어떤 사람이냐?


어제 어느 분이 회개하는 자와 회개하지 않는 자를 구분해서 대해야 한다는 소리에 가슴이 답답했다. 사실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가르치기를 회개하는 자를 용서한다고 가르쳤다. 진정으로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믿고 다르게 살기를 결단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다고 가르쳤다. 정말 그럴까? 용서는 그렇게 조건적일까?


바울은 달리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분명 회개하기 전인데, 아직 우리에게 엄청난 죄가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예수님은 이미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몸부림치던 마틴 루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크고 위대하심을 발견하였다.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고, 우주보다 넓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한 마틴 루터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 루터는 변화되었다. 이제까지 하나님 하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하나님은 이제 무서운 분이 아니고 가까이 더 가까이하고 싶은 분으로 바뀌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회개의 삶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건축하시고 싶은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달은 사람이 나아가는 길이 곧 회개의 길이다. 회개는 그러므로 회복이다.


회개가 우선되어야 용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변화가 있어야 그리스도인으로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품어주어야 변화가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새가슴을 가진 듯 옹졸하기만 하다. 품어줄 마음도 없고, 품어줄 그릇도 없다. 오히려 비판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욕하는 일만 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잔소리로 사람이 고쳐지지 않는다. 정죄함으로 사람이 고쳐지지 않는다. 사랑으로 용서로 품어 안을 때, 아니 십자가를 지고 대신 죽어갈 때 고쳐진다.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윤리종교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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