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Dec 02. 2017

가슴 아픈 기억과 노래

막스 베크만, 제주 4.3사건, 요제프 크로핀스키

2015년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이란 영화가 있다. 짐 캐리(조엘)와 케이트 윈슬렛(클레멘타인)이 주연한 영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 사랑하였다. 둘은 사랑하면서 행복하였고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사랑에는 행복만 있지 않다. 때로 슬프고 아프고 괴롭고 힘든 것도 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도 그런 순간들을 겪으면서 마침내 헤어지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기 위하여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를 찾아간다.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가 있을까마는 영화에는 그런 회사가 있다. 실제 과학자의 실험에 의하면 기억을 지울 수도 있다고 한다. 조엘은 기억을 지워가는 중 비로소 깨닫는다. 아픈 기억도 추억이라고. 그리고 기억은 소중하다고.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어떤 사람은 의도적으로 나쁜 기억을 지워버리고 좋은 기억만 간직하며 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의도적으로 나쁜 기억만 자꾸 되새기며 살아가기도 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어서, 자꾸만 기억나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앓는 사람이다.

전쟁에서 경험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경험했을 때,

아동기의 성적 혹은 신체적 학대를 당했을 때,

테러로 무고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을 때,  

교통사고 등 불의의 사고로 심각한 상처를 가졌을 때,  화재, 태풍, 홍수, 지진,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로 심각한 위협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트라우마로 고통받는다. 그들은 고통 속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을 한다. 괴로운 꿈이나 기억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불안과 초조는 트라우마의 또 다른 모습이다.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1884-1950)이란 독일 화가가 있다. 그는 신화와 종교적 주제를 주로 그리던 화가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막스 베크만은 자원입대하여 위생병이 되었다. 그는 두세 달 후면 전쟁이 끝날 줄 알았다. 순진한 그의 생각과 달리 전쟁은 끝날 줄 몰랐다. 분당 500발씩 쏘는 맥심 기관총이 발명되었는데, 전투는 옛날 방식이었다. 그들은 헬멧도 위장도 없이 긴 총검을 들고 서로 팔짱을 낀 채 앞으로 행진했다. 맥심 기관총은 무자비하게 발사되었고 군인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1916년 7월에서 11월까지 단 4개월 동안 무려 120만 명의 군인이 죽었다.


야전 병원에는 부상당한 병사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의료 기술이 신통치 않았던 그때 위생병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터진 배에서 내장이 튀어나와 소리 지르는 병사의 팔다리를 잡아 주는 것뿐이었다. 베크만은 지옥 한가운데 있었다. 결국, 그는 심각한 트라우마 때문에 불명예제대를 하였다. 그는 한동안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가 붓을 다시 들었을 때 그의 그림은 변하였다. 외상 후 스트레스가 그의 그림을 바꾸었다. 강렬한 색채와 뒤틀린 형태의 그림은 흉칙하였다. 그림은 잔인하고 퇴폐적이고 사회 고발적이었다. 그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의 트라우마 속에서 인간의 악함과 잔인함과 비굴함과 추함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가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이해할 수는 있어도 난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막스 베크만은 말하였다.

"나날들이 흘러간다.

시간이 멈춘 듯 비가 내리고 나는 여기에 있다.

또한, 나는 거기에 없다.

내 자리가 있어야 할 그곳에서 나는 또 멀어진다.

어긋난 내 삶은 나를 계속 끌고 간다."

막스 베크만의 꿈

예루살렘에는 흰놈의 골짜기가 있다. 거기는 자기 신앙이 얼마나 헌신적인지 증명하려고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 몰렉 신에게 바치던 곳이었다. 예레미야 당시 힌놈의 골짜기는 살이 타는 메케한 냄새로 가득하였다. 공포에 질린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눈물과 탄식과 괴로움으로 가득한 골짜기였다.


에스겔 골짜기는 사망의 골짜기다. 마른 뼈다귀들이 즐비하게 있는 죽음의 골짜기다. 죽어서도 가족의 보호와 돌봄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시체가 허옇게 뼈를 들어내며 말라 비틀어져 가는 골짜기다.


시편 84:6에는 ‘눈물의 골짜기’가 나온다. 이스라엘은 약소국이었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온갖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나라다. 남편이 양을 치러 나가서 죽음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권력자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통곡하는 일도 많았다. 말씀 따라 산다고 하였는데 돌아오는 것은 오해와 비난뿐인 경우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억울함과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땅이다.


대한민국도 이스라엘에 뒤지지 않는다. 1947년 제주도에서 삼일절 행사가 있었다. 집회를 구경하던 어린이가 기마 경찰이 탄 말에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화가 난 군중이 돌을 던지자 경찰은 총을 쏘아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났다. 제주도 남로당은 이 사건에 항의하여 파업을 결의하였고, 미군정청은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하였다. 갈등은 증폭되었다.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를 공격하였고, 미군과 경찰은 반격하였다. 경찰은 제주 조천읍 북촌리 남녀노소 400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 진압은 잔인하였다.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 정책에 3,000명이 자수하였다. 불행하게도 1950년 6.25가 터지자 수감 중인 3,000명은 즉결로 사형시켰다.


제주도는 4.3 사건을 경험하면서 좌우가 분명하게 갈라섰다. 누가 우익이었는지, 누가 좌익이었는지 동네 사람은 다 알았다. 서로 고발하고, 서로 죽이던 동네 사람이 지금도 한마을에 함께 살고 있다.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 아팠던 기억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묻어두기로 하였다. 제주에 사는 ‘루시드 폴’이란 가수는 이런 사연을 알고 ‘4월의 춤’이란 노래를 지었다.

“슬퍼하지 말아요.

원망하지 말아요.

우릴 미워했던 사람들도

누군가의 꽃이었을 거야.

미워하지 말아요.

눈 흘기지 말아요.

사랑받지 못할

영혼이란 없는 거라고

노래했다지.”


이탈리아 음악가 프란체스코 로토로(Francesco Lotoro, 1964~)는 나치 수용소에 죽어가던 자들이 만든 음악을 발굴하였다. 강제 수용소에 있던 음악가들 대부분은 그곳에서 숨졌다. 육체와 정신을 말살하려는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음악가들은 노래를 부르고 작곡을 하였다. 1941년 나치에 저항하다 수감된 폴란드 음악가 요제프 크로핀스키가 있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음악 하는 것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는 가스 실에서 죽은 시신의 가죽을 벗기고 무두질하여 갖가지 물건을 만드는 그곳에서 작곡을 하였다. 썩은 주검의 냄새가 나고 사방에 피가 낭자하고 찢기고 잘려나간 시쳇더미 속에서 그는 무려 117개 곡을 작곡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 욕하였지만, 그는 죽음의 그늘이 짙은 그곳에서 희망을 노래하였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노래하였다.

“오, 십자가!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갈망했던가!

나는 기쁘고 즐겁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그대에게 가노라.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제자이기에

항상 그대를 사랑해 왔고

그대를 포옹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었노라."


갈레리우스(Galerius, c260~311) 황제는 안디옥의 지방 장관 아스클레피아데스(Asclepiades)와 함께 기독교인을 체포하였다. 교회 지도자인 안디옥의 귀족 로마누스와 어린이가 잡혔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사형을 당하였다. 사형 집행장에서 아이의 어머니는 말하였다.

“안녕,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네 어미를 기억해다오.”

아들이 처형당할 때 그녀는 노래하였다.

“모두 마음과 소리를 다 해 찬미하고 찬양하여라!

오 주님, 우리는 당신께 복종하나이다.

성도의 죽음이 당신께 귀한 것임을 우리는 아나이다.”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매를 맞고 손과 발에 차꼬를 한 채 수감되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주변의 죄수들은 그 찬송을 모두 들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각자의 아픔과 고통과 눈물과 괴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잊었으면 하는 괴로움 때문에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눈물의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에서 찬송하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노래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인한 로마 황제도, 히틀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의 찬양은 트라우마의 현장을 바꾸었다. 비록 기쁨으로 하는 찬양은 아닐지 몰라도 그들의 찬양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한다. 역설적이지만 눈물 골짜기에서도 찬송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84:6)

그들은 다름 아닌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 고통을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의 기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