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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10. 2017

삶의 기쁨

빈센트 반 고흐의 '성경이 있는 정물'

1885년 10월 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한 줄 편지를 썼다.

‘검은색 배경에 노랑과 갈색 바탕 가죽 커버는 펴졌지만 흰색이 아닌 성경과 레몬 옐로우색 책 한 권이 있는 정물화 한 점을 보낸다. 하루 만에 한 번에 그렸다.'

1885년이면 빈센트 반 고흐가 전업 화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다. 아직 인상파의 영향을 받기 전이기에 그림은 어둡기만 하다. 언뜻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그림 같아 보이지만, 이 그림은 아버지 테오두르스 반 고흐와 아들 빈센트 반 고흐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 그로닝겐 지부 목사였다. 장남이었던 빈센트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는 신학교를 다녔고 벨기에 남부 탄광 지역인 보리나 주에서 임시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전통을 고수하고 엄격하며 보수적이었다. 늘 근엄하고 경건한 아버지 밑에서 빈센트는 숨이 막힐 듯 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연이 끊어지더라도 목사가 되기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리기로 하였다. 실제로 아버지와 빈센트는 그 일로 싸우다 인연을 끊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성경이 있는 정물’을 뚝딱 그렸다. 글씨로 말하면 일필휘지(一筆揮之)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경 옆에 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하는 불 꺼진 촛불을 그렸다. 성경은 그가 생각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검은 배경에 그려진 성경은 엄숙하고, 엄격하고,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아버지들 뜻한다. 앞에 그려있는 노란색 책은 에밀졸라가 쓴 ‘삶의 기쁨(La Joie de vivre)’이란 책이다. 에밀 졸라는 당시 유명한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였고 폴 세잔의 절친이었다. 빈센트는 1883년 발표한 ‘삶의 기쁨’을 읽고 또 읽어 헤어질 정도였다.


‘삶의 기쁨’에는 열 살 때 고아가 된 여주인공 폴린이 나온다. 폴린은 후견인 역할을 맡은 샹토 가에 들어가서 살게 된다. 졸라는 폴린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폴린은 첫 주부터 그 집에 기쁨을 안겨주었다. 예쁘고 건강한 소녀의 차분한 미소는 샹토가의 험악한 분위기를 가라앉혀주었다.'

폴린은 삶의 에너지로 가득한 소녀였다. 그녀는 기쁨이 넘쳤고 밝고 맑은 소녀였다. 하지만 폴린의 삶은 밝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그 남자의 아내를 시중들어야 할 운명에 빠졌다. 그러나 폴린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 속에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도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묻는 노인에게 폴린은 이렇게 대답한다.

“슬퍼질까 봐 두려워 저 자신을 잊으려고 애쓰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요. 거기에 온통 마음을 쓰면 나쁜 일도 참고 받아들일 수 있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아버지가 일생 근엄하고 경직되고 어둡게 사신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삶의 기쁨을 포기하고 살아야 할까? 아무리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다 할지라도 삶의 기쁨을 포기할 수는 없다. 빈센트는 어두운 배경의 성경 앞에 밝은 노란색으로 ‘삶의 기쁨’을 그려놓고 그 책에 빛을 주었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삶을 어떤 으로 보는지 알려준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15:11)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둡고 우울하고 경직된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워놓고 말하였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막10:15)

하나님 나라는 기쁨의 나라다. 그 나라는 행복한 나라다. 근엄하게 폼이나 잡는 사람이 갈 나라가 아니다. 어둡고 우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사람이 갈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밝은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이 갈 나라다.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나는 인도의 관광지나 대도시보다 시골 생활을 체험하고 싶었다. 우리는 고리강가라는 농촌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사님 가정에 머물렀다. 마침 그곳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움막 같은 집은 방 두 개가 있었다. 창문은 얼기설기 나뭇단으로 대충 막아놓아서 밤에는 찬바람이 그냥 들어왔다. 우리가 머무는 방에는 어디서 구해놓았는지 침대 4개가 놓여 있었다. 침대는 칡넝쿨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 누우면 허리 부분이 푹 꺼졌다. 침대에 이불이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그 집 이불을 모두 내놓은 듯하였다. 우리는 가져간 침낭을 꺼내서 그 위에 놓고 잠을 잤다. 전기도 없는 시골이었지만, 우리 때문에 발전기를 돌려 꼬마전구에 불을 밝혀 놓았다. 선잠을 잔 나는 아침에 일어나 밖을 나가보고선 깜짝 놀랐다. 그 집 식구 모두가 이불도 없이 마당에 그냥 누워 자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집 식구는 모두 18명이었는데 장남이 막 결혼하여 신혼이었다. 그러니까 방 두 개 중 하나는 손님을 위하여 다른 하나는 신혼부부를 위하여 내주고 나머지 가족들은 마당에서 노숙하였다. 부억은 자그마한 아궁이 하나가 전부였다. 불 하나로 밥과 반찬을 만들었다. 아궁이가 둘만 되어도 빠르게 할 수 있을 텐데 아궁이 하나로 음식을 만드니 준비는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정오가 되어서야 그날 첫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화장실은 당연히 없었다. 우리는 집 밖 후미진 곳에서 적당히 용변을 보아야 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가난하게 사는 그 사람들의 감정은 피폐하였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언제나 기쁨이 넘쳤다. 밝은 얼굴로 우리를 대해주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웃음으로 맞이하였다. 고리강가에서 머무는 2박 3일은 천국이었다.

오늘날 현대인은 과거에 비교해 엄청나게 윤택한 삶을 살아간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생활은 안락하다. 과학기술은 발달하여 편리함은 말할 수도 없다. 의료기술과 보험 덕분에 조금이라도 아픈 데가 있으면 손쉽게 병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삶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양 괴로워한다. TV 광고는 매일같이 우리의 불만을 자극한다.  신형 차를 사지 않으면 당신은 불행하다. 아름답게 인테리어한 아파트에서 살지 않으면 당신은 불행하다. 새로운 전자제품이 나왔으니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싶거든 사라. 매스 미디어는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자기들이 선전하는 것을 사야만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모두 거짓말이다. 현대인은 계속해서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무서울 때가 있다.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이 두렵기만 하다. 어른들은 웃음과 기쁨을 잃어버렸다. 도스토옙스키가 발표한 ‘악령’이란 소설에서 키릴로프는 외친다.

“인간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하다. 단지 그뿐이다. 그게 전부다. 전부란 말이다!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당장 행복해지리라.”

아이들은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감사한다. 기차길 따라 철로 위를 비틀비틀 걸으면서도 행복함을 느낀다. 가을날 떨어진 노란 은행잎 한 장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별것 아닌 말에도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뻥튀기 한 움큼으로도 만족하였다. 행복은 작고 사소한 것에 숨어 있다. 그 작은 것이 모여서 충만한 행복으로 나간다. 대박이 터져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다. 작은 것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큰 것에도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기쁨을 받아들이는 순전한 마음을 주었지만, 우리는 그걸 잃어버렸다. 키가 크고 자라면서 우리는 기쁨의 샘을 메꾸기 시작하였다. 염려, 근심, 고민, 갈등, 불안, 초조, 수고, 약점, 싸움, 고통. 온갖 쓰레기로 기쁨의 샘을 더럽히고 틀어막았다. 마치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을 블레셋 사람이 온갖 쓰레기로 막아버린 것처럼 이제 우리 인생은 메마르고 딱딱하고 날카로워졌다. 우리는 다시 기쁨의 샘을 파야 한다. 작은 기쁨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소박한 기쁨을 모으고 모으면 샘물이 터져 나올 것이고 그것은 강물이 되고  바다를 이룰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요즘 비트코인이라는 가상화폐가 대박이 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비트코인에 투자하거나, 비트코인을 채굴(mining)하기 위해 혈안이다. 나는 비트코인을 캐서 떼부자가 되기보다 하나님께서 삶 속에 숨겨 놓은 소소한 기쁨을 찾아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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