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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12. 2017

확률적 착시

에스더 이야기 8

그 날 밤 아하수에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에스더 왕후는 왜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왔을까? 무언가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는 데 왜 말하지 않을까? 왕후는 왜 잔치에 하만을 초대하였을까? 그 연회의 주인공은 정말 누구였을까? 나였을까? 하만이었을까? 왕후는 왜 하만에게 관심을 가질까? 내가 왕의 인장 반지를 빼서 하만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내가 하만에게 권력을 다 주었기 때문에 하만을 부른 것일까? 하만과 왕후는 수상한 관계가 아닐까?'

잠자리에 누운 아하수에로는 말도 안 되는 온갖 상상을 하였다. 답도 없는 잡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돌았다. 그 날 밤은 정말 남달랐다. 머리만 대면 잠이 오던 다른 날과는 너무나 달랐다.


마침내 아하수에로는 신하를 불렀다. 지금까지 하만과만 상의하였던 왕은 이제 다른 신하를 불렀다. 그의 곁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묵묵히 따르던 신하였다.

‘그래 내가 지금까지 하만에게만 너무 권력을 몰아준 것 같아. 왕후도 그래서 하만을 특별히 찾았겠지. 이렇게 조용히 내 곁에서 나를 따르는 신하도 있는데.’

“여봐라! 잠이 오지 않으니 역대 일기를 가져다 읽어라!”


역대 일기를 펴니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갑자기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하였다. 하만에게 맡겼던 정치에 왕이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다.

“암살을 고발한 모르드개에게 무슨 상을 내렸느냐?”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습니다.”

“뭐야! 내가 정치에 손을 놓았다고 이런 충신을 외면하다니 말이 되느냐!”

아하수에로는 믿고 맡겼던 하만의 정치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밖에 누가 없느냐?”


마침 하만이 궁전 바깥뜰에 들어섰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기둥에 매달아 죽이려는 허락을 받으려고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그는 일 년을 기다릴 수 없었다. 왕은 하만에게 말하였다.

“내가 상을 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는가?” (에6:6)

교만이 머리끝까지 차 있던 하만은 착각하였다.

‘왕이 상을 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밖에 누가 있으랴.’

“왕께서 상을 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시다면 왕께서 입으시는 의복과 타시는 말을 내어온 다음 그 머리에 왕관을 씌우시고 성내 광장을 돌게 하옵소서. 그리고 왕께서 제일 신임하는 대신에게 말 고삐를 잡고 다니며 소리치게 하소서. ‘왕께서 상을 내리시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해주신다.’”(에6:8,9)

왕은 하만에게 명하였다.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이 타는 말을 태운 후 하만이 말 고삐를 잡고 성내를 다니며 소리치라고 하였다.


본문은 에스더서의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반전은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에스더, 모르드개, 유대인은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유대민족은 페르시아에서 가장 하찮은 민족이었다. 언제 없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고,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슬퍼할 사람은 없었다. 가장 비천하고, 나약한 유대 민족이 이제 일어서게 되었다. 그것은 아하수에로 왕이 잠 못 드는 그 날 밤에 일어났다. 사람이 잠을 못 자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하수에로가 잠을 못 잔 이유는 한가지다. 죽을 운명에 처한 연약한 유대 민족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숨은 역사다. 그 날 밤 사람들은 내일을 알지 못하고 잠들었지만, 하나님은 캄캄하고 어두운 밤에 홀로 일하고 계셨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미련한 사람은 때와 기한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실 때를 정확히 아신다.


모르드개를 공개적으로 죽이려고 했던 하만은 오히려 큰 수치를 당하였다. 모르드개가 왕복을 입고 왕이 타는 말을 타고 다닌 곳은 성내 광장이었다. 그곳은 어제까지만 해도 모르드개가 베옷을 입고 대성통곡하며 왕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던 곳이었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모르드개와 유대 민족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곳이었다. 이제 얼마 후면 그곳에 높은 장대가 설치될 것이고 모르드개는 독수리의 밥이 될 처지였다. 그런데 정말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죽이려고 혈안이던 하만이 말 시종이 되어 모르드개를 칭송하다니. 그 광경을 보던 모든 사람이 속으로 손뼉을 쳤을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모르드개와 하만의 위치는 역전될지도 모른다.


본문에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하만이 왕에게 요구할 때는 분명 왕관도 씌우자고 하였으나 아하수에로는 왕관을 내주지 않았다. (에6:8, 11) 아하수에로는 왕복과 왕의 말은 내줄 수 있었지만, 왕관은 절대 줄 수 없었다. 하만이 왕관까지 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왕은 하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그가 적어도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면 하만의 심보를 읽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독재자는 이인자를 두지 않는 법이다. 항상 부하들이 서로 견제하고 싸우면서 충성심을 입증하려고 노력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아하수에로는 미련하게도 하만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다. 늦게나마 아하수에로는 하만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한편 언제나 부인에게 국정을 소상히 보고하던 하만은 자기의 수치스러운 일도 말하였다. 정세를 정확히 꿰뚫는 세레스가 말하였다.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사람의 후손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에6:13)

아내의 말은 마치 예언과 같았다. 아내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왕의 내시가 하만을 재촉하였다. 왕후가 베푼 잔치에 늦지 않으려고 하만은 서둘러 내시를 따라 나갔다. 그의 빠른 걸음 만큼이나 그의 최후도 빠르게 다가왔다.

일반인과 우울증 환자 중 누가 더 객관적으로 성공 확률을 판단할 수 있을까? 정답은 우울증 환자다. 우울증 환자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려면 부딪히고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정확히 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 그들은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반대로 1%의 희망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생각한 성공확률이 너무나 낮고 보잘것없음에도 그들은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긍정적으로 본다. 그리고 무모할 정도로 앞을 향하여 돌진한다. 우울증 환자가 아닌 일반인이 보더라도 말이 안 되는 짓을 한다. 뇌과학자는 그것을 확률적 착시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그 착각과 망상이 때로 엄청난 일을 이루어낸다.


기원전 334년, 갓 스무 살이 넘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가 확률을 계산하였다면, 이건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페르시아는 대제국으로 군사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쟁은 언제나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공격하였지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부하들이 생각이 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알렉산더를 말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알렉산더를 말리지 못했고, 놀랍게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인도, 이집트 등 중동 전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런면에서 알렉산더는 확률적 착시에 빠져 큰 일을 이룬 사람이다.


그렇다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95개조 의견서를 붙인 마틴 루터는 확률적 착시를 앓던 환자였는가? 지난 천 년 동안 왕들도 모두 교황 앞에 무릎을 꿇었고, 개혁을 도모하던 모든 사람이 불에 타죽거나 단두대에 목이 잘렸다. 루터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루터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우울증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런 루터가 어떻게 95개조 의견서를 붙였을까? 1%의 성공 가능성 때문이었을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패하고 타락한 교권 앞에 성공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마틴 루터가 움직인 것은 딱 한 가지였다. 그가 한 행동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은 진리였고, 정의였다. 죽을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우리가 수천 년 동안 덮여있는 짙은 어둠 속에 갇혔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어디 조그만 빛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어디 조그만 진리라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 진리를 따라야 하지 않을까? 꼭 성공 가능성을 보아서 가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이 진리고 그 길이 생명이고 그 길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라면 죽더라도 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확률을 계산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을 보고, 진리를 보고 나아가는 사람이다.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에스더의 상황은 깜깜한 어둠 속에 갇힌 그리스도인 같아 보인다.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는 비리비리한 종교인들이다. 반면에 세속의 권세는 너무나 막강하여 감히 대항할 수조차 없다. 최악의 상황에서, 깜깜하고 어둡고 답답한 상황에서 확률을 계산하고, 성공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에스더는 성공 가능성을 계산하여 나아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성으로 나아간 것도 아니다. 그녀는 단지 가야 하므로 갔을 뿐이다. 아주 작은 빛을 보고.


오늘 대한민국 기독교는 흑암 속에 있고,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 이제 우리가 다시 일어서려면, 성공 가능성을 타진하며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 데 있지 않다. 초대교인이 말씀 하나 붙잡고 근근이 버텨나갔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도 죽을 힘을 다해 말씀 붙잡고 버텨야 한다. 모두가 잠든 그 날 밤 말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절대로 꺾지 않으시리라 믿는 믿음으로 버텨야 한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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