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 얼굴 수염 그 뉘를 닮았던가.
아버지 생각나면 우리 형 쳐다보았지.
이제 형 그리우면 어디에서 볼 것인가.
두건에 옷 걸치고 냇물에 날 비추어 보아야겠네."-『연암집(燕巖集)』, 「연암억선형(燕岩憶先兄)」
1787년 큰형 박희원이 58세 나이에 죽자 연암 박지원이 쓴 시다.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애틋하다. 연암 박지원은 조선 최대 문장가이다. 그의 글은 자유롭고 감성이 풍부하고 아름답다. 그는 전통적인 한문 표현 양식을 버리고 자유자재로 글을 썼다.
그는 시골 사람이 코 고는 소리를 멋지게 표현하였다.
“일찍이 시골 사람과 함께 잠을 잤는데,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서 어떤 때는 토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휘파람 부는 것 같고, 어떤 때는 탄식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우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불을 부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솥 안의 물이 끓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빈 수레가 덜컹거리는 것 같고, 숨을 들이쉴 때는 드르렁거리며 톱질하는 소리가 나더니 내쉴 때는 마치 새끼 돼지가 씩씩대는 소리가 났다. 다른 사람이 흔들어 깨우자 벌컥 화를 내면서 “나는 코를 곤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甞與鄕人宿 鼾息磊磊 如哇如嘯 如嘆如噓 如吹火 如鼎之沸 如空車之頓轍 引者鋸吼 噴者豕豞 被人提醒 勃然而怒曰 我無是矣) —『연암집(燕巖集)』, 「공작관문고서(孔雀舘文稿序)」
지금까지 어느 한학자도 시골 사람 코 고는 모습을 표현한 적이 없지만, 이처럼 다채롭게 표현하는 사람도 없었다. 연암은 떠돌이 거지나, 이름 없는 농부, 땔나무 하는 사람, 시정 왈패 등 하층민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삶을 글로 표현하였다. 연암은 글 소재를 가리지 않았으며, 표현을 기가막히게 하였다.
정조는 연암의 파격적인 글이 못마땅하였다. 글이란 모름지기 화려함을 추구하기보다 사람이 살아가야 할 마땅한 도리를 담아야 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의 생각에 딱 맞게 글을 쓰는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언제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내용을 글로 썼다. 연암의 시각에서 보면 다산은 고리타분하고, 다산의 시각에서 연암을 보면 경망스럽다. 정조는 연암의 글을 패관문학이라 비판하면서, 엄정한 형식을 갖추고 교훈을 담은 고풍스러운 글을 써야 조선이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인문, 사회, 정치, 경영, 의학, 자연과학 등 모든 방면에 걸쳐 글을 썼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정조가 죽은 후 그는 숙청당하고 유배당하였다. 보통 유학자라면 초야에 묻혀 자기 수양이나 학문에 매진하며 즐길수도 있겠지만, 다산은 세상에 나아가 백성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삶을 돌보는 것을 학문의 목적으로 여기는 실학자였기에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 그가 18년 동안 유배 생활 중 약 500여 권의 책을 썼다. 비록 다시 정치 일선에 나가 자기 뜻을 펼칠 가능성이 전혀 없었지만,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단순한 감상문이나 잡문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임금을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하며 자기 뜻을 담아 글을 썼다.
그의 대표작 중에 ‘목민심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책이다. 그는 서문을 이렇게 썼다.
“이 책을 일러 심서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목민(백성을 보살핌)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내 몸으로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백성을 보살피고자 하는 그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심서'라고 하였으니, 유배생활 18년동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은 연암처럼 화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지만, 자기 뜻과 마음을 질서정연하게 표현하는 위대한 문장가였다.
다산은 유배 생활 중에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백성의 고단한 삶을 보았다. 정치권에 있을 때 보지 못했던 백성의 실상을 보고 그의 글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본래 실학자였기에 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글을 학문적으로 썼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학문을 닦은 결과를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썼을 뿐이다. 그가 아무리 실학자라 해도 정치 일선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그가 전라도 땅에 귀양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글이 정말 실제적이었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현실을 들여다 보면서 진정한 현실의 고민을 담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실학자 가운데 두 거봉인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은 스타일이 전혀 달랐지만, 그들의 글 쓰기 준비과정은 똑같다. 두 사람은 책을 읽거나, 어떤 상황을 보면 즉시 메모하고, 메모지를 모아서, 그것을 정리하여 작품으로 만들었다. 형사 영화를 보면, 범인을 잡기 위해 주인공은 큰 벽에 사진과 스크랩한 것과 메모지를 잔뜩 붙여 놓는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건을 풀기 위하여 자기가 메모한 것들을 정리하고 분석한다. 글쓰기도 이와 비슷하다.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은 초서와 질서를 사용하였다. 초서란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을 발견하면, 메모지에 베껴 쓰고 그 아래 자기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모지를 단지나 나무상자에 두었는데 이를 글항아리라 한다. 메모지가 어느 정도 모이면,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정리한다. 책을 쓰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다산은 이런 말을 한다.
“옛날에는 서책이 많지 않아 독서할 때 외우는 것에 힘을 쏟았다. 지금은 서고의 서책이 집을 가득 채워 소가 땀을 흘릴 지경이니, 어찌 모두 읽을 수 있겠는가? 다만 주역, 서경, 시경, 예기, 논어, 맹자 등은 마땅히 숙독해야 한다. 그러나 강구하고 고찰하여 정밀한 뜻을 얻고, 떠오른 것을 그때그때 메모하여 기록해야만 실제로 소득이 있게 된다. 그저 소리 내서 읽기만 해서는 아무 얻는 것이 없다.”(반산 정수칠에게 주는 말에서)
다산은 메모할 때 날짜와 상황과 출처까지 꼼꼼하게 하였다.
질서는 여행 중이나 누구를 만나 대화하다 생각이 떠오르면, 순간적으로 빠르게 메모하는 것을 말한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했다.
“매양 냇가 바위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거나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멍하니 무엇을 잊어버린 듯하셨다. 때로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붓을 잡고 기록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쓴 조각조각 종잇장들이 상자에 가득 차고 넘쳤다." (과정록에서)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짐 검사를 앞 두고 자신이 소지한 물건을 점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말안장 위에 양쪽으로 늘어지는 쌍주머니를 걸쳐 놓았고,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과 붓 두 자루, 먹 한 개, 작은 크기의 공책 네 권, 그리고 여행 일정을 적은 이정록 한 축을 넣었다.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도 어떤 사건을 보거나 특별한 생각이 나면, 갑자기 말을 세우고 휴대용 벼루를 꺼내 급히 먹을 갈아 외 무릎을 세워 메모하곤 하였다. 길가에서 본 시시콜콜한 풍경, 여관방 벽에 있는 낙서, 길 가다 만난 중국 여자의 머리 모양과 액세서리 등 다양한 기록이 열하일기에 나타난다. 열하일기는 중국을 다녀온 후 수년이 지나서 쓴 것이니, 그가 기억에 의존해서 쓴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산 정약용 역시 자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일어나 촛불을 켜고 그것을 메모한 후에 다시 잠을 잤다. 성호 이익 선생도 메모를 평생 실천하였고, 이덕무 역시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다.
글쓰기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하는 것이다. 아침에 DB 정리부터 하고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은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글은 신통치 않아도 나는 다산과 연암의 글쓰기 준비 작업을 열심히 흉내 내고 있다. 글 쓰는 재주가 시원치 않지만, 가지고 있는 자료를 이용하여 내가 이해한 바를 새롭게 가공하는 것이 나의 글쓰기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참고도서
1. 전호근, 한국철학사, (메멘토, 서울) 2018년, 전자책
2. 정민, 일침, (김영사, 파주) 2013년
3. 정민, 책읽는 소리, (마음산책, 서울) 2012년
4. 정민, 책벌레 메모광, (문학동네, 파주) 2015년
5. 정민,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서울) 2012년
5. 최효준, 다산의 글쓰기 전략, (글라이더, 고양)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