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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05. 2018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인가?

영화 선셋 송을 보고서

2016년 전주 국제 영화제에 출품한 영화 선셋 송(Sunset Song, 2015)을 보았다.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 출신 루이스 그래식 기번(Lewis Grassic Gibbon,1901-1935)이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작가가 여자인 줄 생각하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이 아주 설득력 있게 여성의 관심을 표현했기 때문에 많은 비평가가 여성작가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남자였으며 본명은 미첼(James Leslie Mitchell)이었다. 


미첼은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크리스와 유사한 삶을 살았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학문적 재능이 있었고, 책을 사랑하였다. 그는 전통적 사회에 대하여 도전정신을 가졌으며 여성을 비하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저항하였다. 그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전통과 욕망에 사로잡힌 기성 사회를 비판하였다. 


영화는 크리스의 어린 시절부터 담담히 비추어준다. 때론 슬프게,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가슴 아픈 장면이 이어진다. 크리스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농부의 딸이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자처하지만, 집에서는 폭력을 행사하고 여성을 차별하는 폭군이었다. 교사를 꿈꾸었던 크리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엄마가 자살하면서 그녀의 꿈은 무너진다. 그녀는 읽던 책을 고이 싸서 장롱에 보관함으로써 꿈을 접는다. 그렇게 어린 시절은 덧없이 지나갔다. 


하나 뿐인 오빠마저 아버지의 지긋지긋한 폭력을 피해 고향을 떠나자 크리스는 홀로 남아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그건 지옥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죽게 되자 그녀의 지긋지긋한 삶에 희망의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이웃에 사는 이완을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여 아기까지 낳는다. 크리스 일생에 짧았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 농사도 잘되고 내일에 대한 희망도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전쟁은 국가 차원의 폭력이었다. 이완과 크리스는 전쟁을 피하고 싶었지만, 주위 시선은 따가웠다. 


특히 교회 목사의 설교는 압권이었다. 

“아다시피, 우리는 지금 독일과 전쟁 중입니다. 이 신 바빌론(독일)은 구 바빌론 못지않게 부패했습니다. 이 진노가 언제 끝날지는 지혜와 분노의 신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피와 불로 내리는 징벌이기 때문에 나라들이 들고일어나 반드시 적을 이겨야만 합니다. 이들 나라 중에서도 특히 스코틀랜드는 고대로부터 강건하고 겸손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평화와 용기의 길로 들어서야만 하며 이는 결국 우리의 승리로 이어질 것입니다. 카이저라는 그들의 왕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이 지구의 잔혹하고 사악한 자는 의인이 나서서 쓸어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려 들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공개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로 겁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친독일 겁쟁이입니다.”

영화 속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일본 제국주의 시대 태평양 전쟁에 나가 조국(일본)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한다고 호소했던 목사들의 설교가 생각났다. 종교가 세속 정치의 앞잡이가 되면서 세상 나라의 승리가 마치 하나님 나라 승리인양 호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콘스탄틴 황제 이후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가 보여주었던 행태다. 로마 제국에 전쟁 이데올로기를 정식으로 제공한 신학자는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평화를 창조질서의 속성으로 보았고, 질서를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전쟁과 폭력은 정당하다고 하였다. 문제는 그 평화가 세상 나라의 평화라는 사실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정당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황제라고 규정한 게 문제였다. 다시 말하면 로마 황제가 일으키는 전쟁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한 꼴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도 어거스틴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세상 나라 전쟁에 기꺼이 동참하였으며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특별히 루터가 그리하였다.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정권의 전쟁 야욕에 독일 교회 90% 이상이 찬동한 데는 그런 까닭이 있었다. 세상 나라들이 일으킨 수많은 전쟁과 살상과 폭력을 경험한 후, 21세기 기독교는 세상 나라의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기독교는 원래 평화의 종교였다. 초대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칼을 버려야 하며, 따라서 군 복무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폭력을 가져오는 분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오는 분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인은 한결같이 로마 제국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였고, 로마 제국의 폭력 앞에서도 언제나 무저항 비폭력으로 대하였다. 


지금 대한민국은 폭력과 평화, 전쟁과 화해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기독교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그런데도 세상 논리를 따라 기독교 정신을 포기하려는 사람이 있다.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그리하였다. 인간 공동체는 개인보다 더 이기적이어서 선한 일을 하기가 개인보다 더 어렵다. 그러므로 국가가 평화를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니버는 예수님께서 사랑의 무저항을 가르쳤다는 사실, 사랑이 궁극적 윤리 규범이라는 사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언제나 선한 목적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 전쟁에서건 정치 행동에서건 모두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세상 나라를 향해 평화를 요구하고,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였다. 


라인홀드 니버의 실용적인 윤리 사상에서 실천할 것은 없다. 세상 나라가 언제 예수님의 정신을 따랐던가? 그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나님 나라 공동체라고 자부하는 교회가 사랑과 평화와 비폭력을 포기하고 세상 정치가들의 논리를 따라 폭력과 전쟁과 증오와 다툼을 설교할 수 있는가? 세상이 아무리 폭력을 이야기해도 교회 공동체는 평화를 이야기해야 하고, 세상이 아무리 혐오를 이야기해도 교회 공동체는 화해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실천해야 한다. 


미첼은 소설을 통하여 폭력과 전쟁을 설교하는 목사를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의 실상을 고발하였다. 나는 잔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영화를 보던 중, 목사의 설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 크리스는 어려서 아버지의 잔인한 폭력에 시달렸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어린 크리스는 저항할 수 없었다. 보수적인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여성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분위기에서도 크리스는 대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가정이 파괴되고 전쟁에 나간 남편 이안이 죽자 오열한다. 왕과 장군은 거짓말쟁이들이고 그들은 평화로운 가정을 깨트리고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 갔다고 오열한다. 그녀의 행복은 깨어졌고, 꿈도, 소망도 깨어졌다. 


아무런 소망 없는 그녀에게 남은 것은 땅뿐이었다. 그녀는 깨닫는다. “땅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바다, 하늘, 그곳 사람들은 그저 숨결에 불과하다. 하지만 땅은 남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석양이 지는 어스름 속에서 자신이 곧 땅이란 걸 느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비가 와서 흠뻑 젖은 땅에 철조망들이 있고, 여기저기 무기들이 흩어져 있는 전쟁터를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과 폭력이 얼마나 이 땅을 망가트렸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땅은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주고 그들에게 다시금 식량과 안식을 안겨준다. 노을이 짙게 드리운 하늘 아래 땅을 바라보고 서 있는 크리스의 모습은 인생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마땅히 평화와 안식을 주어야 할 가정도, 종교도, 사회도 다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오직 피해자로 힘없이 살아가는 여성(대지)만이 인간에게 생명과 희망을 줄 뿐이다. 영화는 그런 메시지를 담고있다. 나는 영화가 말하는 것에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구겨지고 왜곡된 종교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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