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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05. 2018

리딩으로 리드하라.

대학에 입학하여 언약 신학을 배울 때였다. 담당 교수인 김인환 교수는 우리에게 매시간 일정한 분량의 책을 읽고 발표하도록 하였다. 미국에서 갓 들어온 교수는 열정적이었다. 발표하는 학생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를 평가하였다.  

‘잠깐 학생 지금 방금 말한 은혜의 정의를 내려보게!’

‘은혜가 은혜지 뭔가요……. 쩝’

‘은혜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리지 않고 모두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사용하는 것은 문제다.’

‘교인들이 생각하는 은혜와 네가 생각하는 은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와 지금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은혜가 다를 수 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언어에 대한 개념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모두 안다는 전제하에 마구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거야!’

‘서로 안다는 생각으로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지만, 사실은 서로 다 다르게 알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거야!’

교수의 날카로운 질문에 어린 우리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도 강의 시간 내내 등골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  


그때는 김인환 교수가 저승사자처럼 무서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참 좋은 선생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기독교 용어를 바르게 정의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한다. 교파마다 개념이 다 다르다. 교인들도 각자 신앙 성장 배경이 다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용어를 사실은 제각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회 안에서도 이 모양인데, 교회 밖 사람들과 대화할 때 모습은 어떨까?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선교적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단 한 번도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누가 차원 높은 종교적 문제를 가져오면, 예수님은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삶의 언어로 답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삶의 예화(비유)로 가득하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소통의 천재였다.  


전도지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단어(복음, 영접, 회개, 죄사함, 구원, 은혜, 거듭남, 성령 등)를 불신자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전 처음 교회 나온 사람이 흔히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구원이 뭔지 모르겠고, 복음이 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물으면 교인도 ‘나도 잘 모르니 목사님에게 물어보세요.’ 대답한다.  


기독교가 선교적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는 소통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많은 전도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못 알아들으면 말고.’를 외치면서 자신은 선교의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만일 목사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잔뜩 사용하고 신학자들의 견해를 이용하여 멋진 설교를 하였다고 하자. 교리적으로나 학문적으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교인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때 설교자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말하면 변명이 될까?


전도사 시절 김세윤 박사가 한국에 와서 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많은 학생이 어려워서 못 듣겠다고 하여서 얼마나 어렵게 하길래 그러나 하고 찾아가 들었다. 영어는 기본이고,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강의하는 그의 학문적 실력은 정말 탁월하였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한국말이 서툴렀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아무리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소통하지 못하는 학문은 힘이 없다.  


오늘날 기독교는 어떠한가? 자기들끼리는 훌륭하다. 자기들끼리는 의사소통이 된다고 주장한다.(정말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제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굳이 세상과 소통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은 논외로 하겠다. 복음은 불신 세상에 전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복음은 반드시 소통하여야 한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존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개설하면서 신학생을 철저하게 교육하였다.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 교육 운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직접 커리큘럼을 구성하였다. 성직자 양성은 신앙교육만큼이나 ‘사람됨’의 교양 교육을 중시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초등과정과 고등과정으로 나누었다. 초등과정에서는 학생에게 이해력과 표현력을 키우도록 강조했다. 라틴어, 불어, 그리스어 및 고전 지식을 강조하였고, 말하기와 글쓰기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고등과정은 신학, 히브리어, 헬라어, 문학, 변증학, 수사학, 물리학, 수학, 민법을 가르쳤다. 칼빈은 키케로를 모델로 해서 제네바 아카데미 학생이 충분한 인문학적 소양 위에 신학을 배우기를 원하였다. 1) 칼빈의 노력으로 제네바 아카데미 출신 학생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인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법학, 수학까지도 섭렵한 그들은 당대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세상의 그 누구와도 자유롭게 토론하고 소통할 수 있었다.  

제네바 아카데미 커리큘럼

지금 한국의 신학교는 어떤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을까? 인문학을 가르치기는 할까? 신학생이나 목회자가 자연과학, 법학, 수학, 고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을까?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책은 제대로 읽고 있을까?  세상에 대하여 알기 싫어하고, 세상의 학문이라 외면하여 버리면 청맹과니가 될 수밖에 없다.2)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를 외치며 자기 합리화하는 그리스도인을 보고 예수님은 얼마나 슬퍼하실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너무나 많다.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책 제목처럼 기독교는 풍부한 독서와 인문학적 소양으로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  


1) 김유정, ‘근대 유럽 지식네트워크의 중심 제네바 대학 : 칼뱅의 시대, 종교개혁과 대학의 설립 배경을 중심으로’ EU연구 제 38호, 2014년, 194-195쪽

2)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을 가리켜 청맹과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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