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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01. 2018

토마스 크랜머의 공로

영국의 종교개혁을 일으키는데 일등 공신이 있다면 두말할 것 없이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귀족계급이 모든 것을 장악한 중세 영국 사회에서 가난뱅이 평민으로 태어나 영국 국왕의 정신적 지도자인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그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영국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영어 성경의 출판에 힘을 썼으며,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자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대륙의 종교개혁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영국적 상황에 접목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먼저 교회의 예배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교회의 전례를 위해 계획된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개정하고 영국 전역의 강단에서 전해질 설교문을 교회력과 일치하도록 작성했다. 그의 설교문은 목회자가 없는 교회를 위하여 작성된 복음적 설교들이었다. 


1533년 크랜머와 같은 개혁 성향을 가진 런던의 주교 리들리(Lidley)와 함께 영국 최초의 신앙고백서 42개조항을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이 조항을 통과시킬 즈음 에드워드 6세가 죽음으로 크랜머의 신앙고백서는 유보되었다. 

그리고 캐톨릭적 성향을 가진 메리 여왕이 등장하면서 크랜머의 개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영국은 다시 캐톨릭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크랜머는 하루 아침에 감옥에 유폐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크랜머는 지속되는 박해에 잠시 흔들리기는 했지만 결국은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하게 되었다. 


세월은 지나 메리 여왕도 죽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장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종교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왕권이 확고 부동한 자리에 서기를 더 원하였다. 그녀는 영국 전체에 두세명의 설교자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할 정도로 설교를 싫어했다.신학자들의 논쟁도 싫고, 개혁이니 캐톨릭으로 복귀니 하는 것도 다 싫었다. 그녀는 크랜머의 42개 조항 가운데 재세례파에 대한 강한 반감이 표출된 마지막 세 조항을 뺀 39개조 신앙 고백을 영국 교회의 공식적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다. 엘리자베스는 크랜머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종교개혁적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결국 영국 교회의 39개조 신앙 고백은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신앙고백이 되었다. 


영국 성공회가 비록 매우 캐톨릭적인 성향을 가졋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가끔씩 종교개혁 사상에 근거한 바른 신학자들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 39개조 신앙고백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논쟁과 싸움이 귀찮아서 이미 만들어진 크랜머의 신앙고백을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게 된다. 18세기 조지 휫필드, 19세기 존 라일, 20세기의 C.S. 루이스, 21세기의 존 스토트와 알리스터 맥그래스 같은 걸출한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영국 교회에서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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