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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02. 2018

전깃불과 감사

어렸을 적 시골 외가는 호롱불을 켰다. 그을음이 살짝 올라오는 호롱불 곁에 모여서 외사촌들과 함께 떠들며 웃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외가가 있는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던 날은 근엄하시던 외할아버지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였다. 한동안 전깃불을 바라보면서 놀람과 신기함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기가 들어온 날은 1887년 2월 초쯤이다. 100촉짜리 아크등 두 개가 경복궁 뜰과 내전을 밝혔다. 발전기를 가동하면 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고종은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년 동안 신변의 불안 때문에 러시아 공관에 몸을 피했다가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전깃불을 밝히라고 명령하였다. 나쁜 일은 언제나 밤에 일어나니 밤도 낮과 같이 환하게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노략질하는 이리 떼처럼 외세가 조선을 겁탈하려는 때였기에 고종의 두려움과 공포는 더욱 심하였다. "불을 밝혀라!" 고종의 명령으로 덕수궁에는 자그마치 9백 개의 전등을 설치하여 밤을 낮처럼 환하게 하였다.  어둠은 고종에게 두려움이고 공포였다. 


우리는 밤의 공포와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흔히들 도시는 밤에 빛난다고 말한다. 낮에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밤이 되면 홍대나 강남 골목을 서성이는 젊은이들이 많다. 낮보다 밤이 훨씬 좋다고 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밤이 무서웠다. 위트레흐트 주교는 ‘낮이 산 자를 위한 것이라면, 밤은 죽은 자를 위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유령이 밤마다 무덤에서 빠져나와 동네를 배회하기에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였다. 전통적으로 어둠은 악마와 악령, 그리고 지옥과 진배없는 장소에서 고통받는 유령과 같은 무시무시한 초자연적인 존재에게나 어울린다고 생각하였다. 산티아고 가는 길의 순례자들은 밤의 공포 때문에 교대로 불침번을 서야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자는 시간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시간이며, 인간을 집어삼키려는 사탄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성도들은 잠들기 전에 기도하였다.  

“깜깜한 밤중에 사탄이 억누르려 할 때 황금 무기를 잡은 거룩한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를 지켜주소서.  

우리는 비록 눈을 감고 잠잔다 할지라도 밤에도 주무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옵소서.  

‘밤의 모든 걱정과 유혹에서 우리의 마음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지켜주소서’

루터는 기도하였다.  

“우리의 눈은 잠들었으나

우리의 마음은 당신을 향해 깨어 있사오니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를 두르시고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풀어 주소서.”


새벽 아침 동쪽 하늘에 태양이 떠오를 때 고대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제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날 하루 해야 할 업무로 괴로워하기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네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7-8)  

그들은 새벽 아침에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예수님은 이른 아침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성도들도 떠오르는 빛의 고마움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 불안과 걱정으로 일찍 일어나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무익하다고 생각하였다. 오늘 하루도 새롭게 열어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뜻을 찾았다. 아침은 그렇게 성도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왔다.  


성도들이 새벽 이른 아침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전통이 되었다.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연의 흐름, 낮과 밤의 변화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마24:32)  

예수님은 자연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셨다. 공중에 나는 참새도 들에 핀 백합화도 모두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었다.  


현대인은 과학의 힘을 통해 밤 시간을 얻었지만, 아침에 떠오르는 빛이 주는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아름다운 자연만물을 무심코 지나치는 현대인은 참으로 불쌍하다. 개미 쳇바퀴 돌아가듯 시간을 보내면서 푸르른 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가 없는 현대인은 애처롭다. 발걸음이 바쁘면, 주님과 동행하기 어렵다.  

조금 느리게 걸어보자.  

조금 여유 있게 걸어보자.  

그리고 주변을 보자.  

무심코 지나쳐 버린 자연, 이웃, 시간, 삶 속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참고도서

1.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옮김, (대한기독교서회;서울), 1996년

2. 장클로드 슈미트, '유령의 역사', 주나미 옮김, (오롯;인천),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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