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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09. 2018

용서하는 공동체

경건한 사귐은 아무도 죄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앞에서뿐 아니라, 사귐 앞에서 자신의 죄를 덮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감히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정말 죄인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깜짝 놀랍니다. 

그것은 정말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더불어 홀로 살아갑니다. 

한데 이것은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회퍼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생명까지 다 바치시는 분이신데, 교회 안에는 죄인을 찾기 어렵다. 예수님은 용서와 이해와 사랑을 베풀고 싶은데 교회 안에는 그것을 사모하는 자가 드물다. 


혹여 교회 안에 죄인이 있다든가, 상처받은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정체를 잘 숨겨야 한다. 경건한 척하며 의로운 척하는 사람들 앞에서 경솔하게 자신의 허물을 이야기했다가 생매장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마음이 답답하고 정말 힘들 때는 아무도 없는 골방을 찾아야 한다. 홀로 운전할 때 소리치고, 눈물 흘릴 수 있으나 공동체에서는 참아야 한다. 


청년부 사역을 할 때 일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년부에 들어온 한 여청년이 있었다. 키가 작고 조용한 그녀는 순수하였다. 서울 생활이 힘들고 어려울 때 시골에서 하던 데로 청년들을 붙잡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예의로 받아주던 청년들이 점차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나 살기도 바쁘고 힘들어 죽겠는데 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잘 사는 척, 행복한 척하는 위선에 익숙했던 터라 솔직하게 다가오는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청년들은 뒤돌아 서서 그녀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털어놓았던 아픔은 고스란히 가십거리가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왕따가 되었다.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그녀는 청년부를 떠났다. 


청년부는 다시 행복해졌다. 모일 때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세요?’ 인사하면 ‘잘 지내고 있어요.’ 서로 행복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가득하였지만, 돌아서면 허무한 공동체였다. 기도 제목을 나누는 시간이 되면, 제일 힘들어했다. 머리를 잘 써야 했다. 제일 쉬운 기도 제목은 교회 부흥을 위하여, 남북통일을 위하여, 목회자를 위하여, 청년부 단합을 위하여 등등이다. 아무튼 자기 속사정이 드러나지 않은 기도 제목이어야 한다. 자칫 언제 구설에 오를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예수님은 우리 사이의 죄를 처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죄를 용서하므로 깨끗이 청소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을 하기 싫어한다. 여기저기 검은 비닐봉지에 꽁꽁 싸매어 둔 죄를 뒷주머니에 달고 다니면서 냄새를 풍기는 데 우리는 모른 척 외면한다. 


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진정한 사귐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죄라면, 하나님께 처리를 부탁해야 한다. 골방에 들어가서 무릎으로 회개하며 눈물로 자백해야 한다.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한량없이 베푸는 분이시다. 니느웨의 죄악을 용서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요나는 탄식하였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욘4:2 새번역)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저지르는 죄악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저지르는 죄악이 훨씬 더 크다. 솔직히 우리는 거룩하고 경건한 존재라기보다 세속적인 존재이다. 사람들 사이에 저지른 죄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결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 죄를 처리할 권세와 능력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셨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듯하다. 다 고백하면 용서해주겠다는 말 한마디 믿고 고백했다가 봉변을 당하는 사람을 한두 번 목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용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몇 달 전부터 친구가 전화했다. 나의 아픔과 고민을 알고서 끈질기게 전화를 했다. 위로하려 함이고, 책망하려는 뜻도 있었다. 나는 친구의 전화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오늘까지 버텼다. 이 글을 쓰면서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제 내가 먼저 친구에게 전화하겠다고 결심하였다. 남의 아픔과 속사정을 헤아려주지 않는 친구는 친구라 할 수 없다. 


죄와 허물과 아픔과 눈물을 함께 나누지 못하면 진정한 교제는 있을 수 없다. 냄새나는 비닐봉지를 이제 풀어야 할 때이다. 혼자 외롭게 떠는 빈 공간에서 풀 것이 아니다. 함께 마음을 나누어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친구 그리스도인과 함께 풀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나눌 그런 친구와 함께 말이다. 혹시 그런 친구가 없다고 하소연하는가? 


그 친구는 다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다. 당신 주변에 검은 비닐봉지를 가지고 불안에 떨며 언제 이것을 폐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분명 있다. 우리 주변에는 죄인 투성이다. 교회 안에 숨어 있는 죄인의 상태는 더욱 심각하고 더욱 많다. 만일 나 스스로 빗장을 풀고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생 진정한 그리스도인 친구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죄를 고백하여야 십자가로 이르는 길이 뚫린다. 

내가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십자가 앞에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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