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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14. 2018

외로움 처리법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아침, 뉴욕 월스트리트 증권 거래서는 혼란에 빠졌다. 주식이 최악의 수준으로 폭락하였다. 기업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미국을 시작하여 전 세계에 대공황이 휩쓸었다.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시행하면서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였다. 도로, 교량, 공항, 공원 및 공공시설들을 건설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었다. 농민들을 도와주기 위한 농업 조정법도 시행하였다. 뉴딜 정책은 수많은 법안을 통과시켰고 산업 생산 능력을 높이도록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연방 예술 프로젝트(Federal Art Project) 및 연방 작가 프로젝트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투자를 하였다.

당시 헝가리에서 이민 온 화가 릴리 푸레디(Lily Furedi, 1896~1969)도 지원을 받아 ‘지하철’이란 그림을 그렸다. 1930년대 뉴욕 지하철 승객을 묘사한 그림이다. 밝은색으로 그렸지만, 승객들은 밝지 않았다. 그들은 가능한 한 서로 쳐다보는 것을 피하였다. 대개 시선은 아래로 향하였다. 가끔 옆 사람을 흘끔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 남자는 립스틱 바르는 젊은 여성을 훔쳐본다. 한 여성은 옆에 남자가 읽는 신문을 곁눈질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무표정하고 지친 표정으로 외로움이 진득하게 묻어있다.


1930년대 뉴욕 지하철 모습은 현재 서울 지하철 승객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패셔너블한 옷을 입고 비싼 가방을 들었지만 대개는 무표정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눈인사를 나누기는커녕 몸이라도 닿을까 염려하여 가능한 한 떨어지려고 한다.

“난 당신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난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거예요.”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 서울은 외로움으로 가득하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고, 수다도 떨지만, 누구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끔 친구들하고 수다를 떨지만 사적이고 내면적인 이야기 대신, 단순한 잡담으로 채울 때가 많다. 대부분 나와 별 관련이 없는 타자에 대한 이야기나, 텔레비전 이야기, 뉴스 이야기들뿐이다. 집으로 돌아갈 때면,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탄식한다.


외로움을 이겨보려고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하다간 상처받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그도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고달픈 인생에서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하면 외롭지 않을 거란 막연한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참 외로웠던 분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는 사람도 있었고, 벼랑으로 밀쳐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 뺨을 때리기도 하고, 거짓 모략으로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기도 하였다. 그 중에 종교인들은 더욱 심하였다. 그들은 호시탐탐 예수님을 고소할 기회를 찾으려 했다. 언제나 가까이 다가와서 다정하게 말하였지만, 그들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가득하였다. 예수님은 거울 방에 사시는 것 같았다. 일거수일투족 낱낱이 훔쳐보며 험담을 일삼았다. 심지어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배반하였다. 결국 예수님은 조롱과 멸시 속에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놓아야 했다. 예수님은 정말 외로우신 분이셨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원수들 가운데서 살았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각오하셨던 듯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2:17)

그들에게 상처받고 아픔을 겪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예수님처럼 원수들 사이에 머물러야 한다. 그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 그 가운데서 복음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마치 동호회 모이듯이 교회로만 모여든다. 그리스도인끼리 마음 문을 열고 서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교제를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교회안에는 형식적인 만남도 많다. 사역때문에 피곤한 만남도 있다. 어쩌면 종교라는 껍데기 때문에 서로 의로운 척, 경건한 척하다 보면 외식하기 쉬운 것이 그리스도인의 만남이다.


진심으로 바라건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덮어주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함으로써 힘을 얻어 세상에 나가 복음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보여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열매는 세상에서 맺어야 한다. 적대하는 세상, 외로운 세상이 싫어서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만 몰입한다면, 기독교는 위로 클럽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선교적 공동체는 될 수 없다. 루터는 말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가 그대들처럼 행했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


예수님이라고 제자들, 추종자들, 믿음의 동료들과 교제가 좋은 줄 몰랐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외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신 예수님 덕분에 오늘 우리는 구원받았다. 구원을 누리기만 하고, 축복을 누리기만 하고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여기에서 멈추고 말 것이다. 세상에서 겪어야 할 외로움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의 한 다른 면일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외로움은 단순한 고통일 수도 있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기쁨이 될 수도 있다.


참고도서

1.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옮김, (대한기독교서회;서울) 1996년

2. 헨리 나우웬, '영적 발돋움', 이상미 옮김, (두란노;서울)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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