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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16. 2018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헌법을 읽어보면 그 나라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의 메이지 헌법(1889년)은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지향한다.

메이지 헌법 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메이지 헌법 3조 “천황은 신성으로서 침범할 수 없다.”


천황은 법적인 인격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아라히토가미, 現人神)이다. 일본의 백성은 천황의 백성으로 ‘신민(臣民)’이다. 천황은 머리이고 백성은 손과 발로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체제이다. 일본인에게 천황은 신이고 아버지이고 대원수이고 우두머리이다. 그들은 천황의 명령에 목숨을 걸었다. 천황이 명령하면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다 천황이 항복하면 일본인 모두는 무릎을 꿇었다.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켰을 때 일본인들은 깜짝 놀랐다. 신하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조선의 황제는 국권을 넘겨주는 문서에 서명을 했는데 조선의 백성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반발하였다. 황제가 나라를 포기했는데, 백성은 오히려 독립을 선언했다. 이 나라는 황제의 나라도 아니고, 권문 세족의 나라도 아니고 기득권층인 양반의 나라도 아니고 우리 민초의 나라다. 기미 독립 선언문은 당당하게 외친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양반이나 지식인이 의병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민초들이 곡괭이와 낫을 들고 일본에 저항하였다. 수직적인 세로 사고구조를 가진 일본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은 세로 사회 같아 보이지만 가로 사회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왕이라도 부당한 명령을 내리거나, 잘못을 범했을 때는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나가 항소하며 저항하는 백성이었다. 지식층인 양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농민, 백정, 종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였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저항 정신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조선이 망한 후 백성은 좌절하지 않았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주와 연해주를 방랑하던 청년 안중근은 자신을 '조선인(朝鲜人)'이라 하지 않고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 불렀다. ‘대한국인’을 누가 제일 먼저 썼는지는 잘 모르지만, 청년 안중근은 없어진 ‘조선’에 연연하지 않았다. 조선 500년의 유구한 역사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왕이 없고 지도자가 없다 할지라도 그는 당당한 ‘대한국인’이었다. 비록 나라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난민’이라 할지라도 기죽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국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헌법 전문)


우리나라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발해, 조선을 거쳐오면서 훌륭한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랑할만한 것을 꼽으라면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부족할 지경이다. 그러나 ‘대한국인’은 그 모든 것을 명시하지 않았다. 대한국인은 불의에 항거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한 민주사회를 만드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규명한 대한국인의 정체성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저항이다. 이는 천황을 신으로 여기고 절대적 복종을 하는 일본의 정체성과 완벽하게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어떠한가? 신명기는 하나님 나라의 헌법과도 같다.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나라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백성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묘사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이러하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신5:6,15,6:12,21, 8:14, 13:10, 15:15, 16:12, 24:18)


신명기에서 계속하여 강조하는 말씀이 너희는 애굽의 종이였다는 사실이다. 그걸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구약의 큰 절기는 모두 출애굽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우리 옛말에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 한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종’이었던 시절을 절대 잊지 말라고 강조에 강조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종들의 나라다. 고대 사회의 종은 사람이 아니라 재산(물건)이었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던 종은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이 당연하였다.


로마 시대의 그림을 보면 귀부인들이 목욕하는데 남자 노예들이 시중드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게 가능한 이유는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명기 법의 핵심을 한마디로 하자면 세상에 인간 아닌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노예도 사람이고, 외국 나그네도 사람이고, 난민(도망친 노예)도 사람이다. 그들 모두를 사람으로 대하라는 것이 하나님 법 정신이다.


인류 문화 대부분은 이방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신화가 있다. 외지인을 붙잡아서 사회에 만연한 악에 대한 책임을 지워 희생시킨다. 이런 희생양 전략을 통하여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 누가 우리에 속하고 누가 배제되는가를 규정한다.


고대 마야 사회는 희생 제사를 위하여 전쟁하였다.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은 인신 공양을 위한 제물이 되었다. 포로가 부족하면 노예를 제물로 드렸다. 적국의 포로나 노예는 모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라 ‘타자’였다.


고대 사회에서 주인이 죽으면 노예를 함께 묻어버리는 순장 제도가 있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고, 언제든지 희생하여도 할 말이 없는 타자였다. 중세 서양 사회에서는 마녀사냥이란 형식을 빌려 타자를 죽였다. 이방인, 타자, 나그네, 노예 등은 필요할 때는 이용하다가 한순간에 희생제물로 삼는 문화 풍조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회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이들이 공격 대상이었다. 어떤 사회든 약자는 권리가 없다.


그런데 수천 년 전 이스라엘이 나라를 세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법은 약자를 보살피라 하였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신10:18)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10: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할찌니라.”(신27:19)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사회의 약자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평하였다.

그들이 네 가운데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겔22:7)

에스겔은 부모를 업신 여기는 것과 나그네를 학대하는 것과 고아와 과부를 해하는 것을 같은 급으로 보았다. 이스라엘이 다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와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하여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이다. 죽어 마땅하고 지옥 가 마땅한 죄인이다. 의인인척 안 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2:11)

그리스도인은 낯선 곳에서 차별대우 받으며 불편하게 살아가는 나그네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시민권을 포기한 사람과 같다. 그러니 제발 힘 있는 자 편에 붙어서 권세 있는 자처럼 행동 안 했으면 좋겠다.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참고도서

1. 이국운, '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김영사 ; 서울) 2017년

2.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이지영 옮김, (개마고원 ; 서울) 2004년

3. 김태진, '근대 일본의 통치라는 신체성 - 메이지 헌법의 구성과 바디폴리틱', 한국동양정치사상연구 16(1) 2017년 3월,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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