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Aug 23. 2018

희망의 신비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꿈을 먹고 꿈을 향해 전진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 뺨칠 정도로 과거의 수고를 똥같이 생각하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분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으로 그런 논리를 전개해 나갔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늘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일본 삿포로에 있는 홋카이도 대학의 표어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少年よ大志を抱け)라고 합니다. 삿포로 농업학교 초대 교감인 윌리엄 클라크가 늘 하던 말을 표어로 삼았지요.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인용하여 젊은이들에게 소망과 비전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젊었을 적에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내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야망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큰 능력이나 학식 때문에 야망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으니까 그저 막연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기회는 충분하고, 의욕도 있으니까 잘 될 거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생을 마감할 시점이 다가오면서 지나온 삶을 돌이켜 봅니다. 이루어 놓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몸은 점점 무거워집니다. 신호등이 깜빡이는 것을 보면서 자꾸만 갈등합니다. ‘뛸까? 말까?’ 젊었을 적에는 아무 생각 없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이 자꾸만 부어서 걱정입니다.


제 동기 중에 벌써 셋이나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직은 젊고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 의술이 발달하였다 할지라도 우리 주변에는 안타까운 이별로 눈물흘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뜻하지 않게 암을 발견하고 항암치료하며 신음하는 분도 있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명퇴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분도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망가지고,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는 아픔을 겪는 분도 있습니다. 회복하고 싶은데 수렁에 빠진 듯 점점 힘을 잃어가는 분도 있습니다. 삶의 밑바닥에서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자꾸만 발목을 붙잡는 것 같습니다. 희망, 야망, 소망, 비전을 꿈꾸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땅을 왜 떠나야 했을까요? 그는 무슨 위대한 꿈과 비전을 가졌을까요? 75세 나이지만,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큰 야망으로 힘차게 걸어갔을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솔직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는 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힘이 있었다고요? 전 왠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저 발걸음 닿는 대로 갔습니다. 그렇게 흘러 흘러 남쪽 애굽까지 내려갔습니다. 그가 애굽의 바로왕 앞에서 비굴하게 자기 혼자 살려고 부인을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하겠다고 했지만,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종 엘리에셀을 아들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첩을 들여서 후계를 이어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간청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는 확신보다 불안과 염려가 더 컸습니다.


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야망에 가득 차고, 비전에 부풀어 힘차게 나아갔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빠져 떠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고향을 떠나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곳에 가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독일에 광부로 간호사로 떠났던 분들, 하와이와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났던 분들의 삶은 피와 눈물이었습니다. 유학이든 이민이든 제 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에서 비비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별이란 차별은 모두 겪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시대는 차별이 없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자기 부인 사라가 죽었을 때 장사지낼 땅 하나가 없어서 큰돈을 주고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큰 돈을 냈다는 것은 혹시라도 빼앗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때는 그런 일이 흔했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면 가나안 사람들이 와서 돌로 메꾸고 빼앗았습니다. 지금과 달리 땅 소유권이 불분명한 시대에는 오직 힘이 말할 뿐입니다.


전 왠지 아브라함이 절망했기 때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고향에서는 더 버틸 수 없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신시아 부조는 그의 책 ‘희망의 신비’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 비로소 희망이 움트기 시작한다.”

희망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가 있을 때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은 반대입니다. 우리가 품었던 희망이 꺾여 버렸을 때, 기대하고 소망했던 바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을 때, 절실한 기도와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이제는 오직 죽음이나 파멸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할 때, 나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은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욥19:25-26, 공동번역)


'살갗이 다 뭉그러지고 내 살이 질크러지라니'는 어떤 상태일까요? 고문을 당하면, 살과 뼈가 으스러진다고 합니다. 곤장을 10대만 맞으면, 엉덩이 살이 다 뭉그러지고 장독이 올라 죽는다고 합니다. 절대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 앞에 어디다 하소연 할 데도 없는 상황입니다. 맞아 죽어도 ‘아야!’ 소리 한번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끙끙거리는 신음에 묻어있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욥의 노래를 가만 살펴보면, 욥은 지금 누구에게 맞았습니까? 세샹의 절대 권력자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최종 심판자, 우리의 옳고 그름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판단하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신 것입니다. 온몸에는 헌데가 나서 기왓장으로 벅벅 긁어 피고름이 나고 있습니다. 자녀는 모두 죽었습니다. 아내는 온갖 악담을 퍼붓고 떠나갔습니다. 그가 기댈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희망을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 떼는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 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야훼 나의 주께서 힘이 되어주시고

사슴처럼 날랜 다리를 주시어

나로 하여금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십니다.”(합3:17-19, 공동번역)


하박국의 상태는 절망 그 자체입니다. 눈 씻고 찾아보아도 희망은 없습니다. 그는 버림받았습니다. 자살은 죄라고 하지만, 그가 내릴 결론은 죽음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기뻐 춤추며 뛴다고 합니다.하박국 선지자가 정신 줄을 놓은 것이 아니라면, 이건 기적입니다.


로제 수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감히 희망할 수 없는 그것을 그분께서는 당신에게 주십니다.”

인간의 능력이 크다면, 하나님이 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희망은 필요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절망을 바톤 터치하여 희망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희망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희망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희망은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고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가로놓인 모든 장벽을 허물게 하십니다. 공포, 두려움, 절망, 갈등, 싸움, 불확실, 미움, 분노, 복수심 모든 더럽고 추한 것들을 다 몰아버리고 그곳에 희망의 꽃을 심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전 이제 우리 주변이 더러워질 만큼 더러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자꾸만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절망의 수렁에서 점점 미끄러져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이 지저분한 쓰레기통에 하나님의 희망이 새롭게 꽃 피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역설이지만, 전 절망하기에 희망하렵니다.

 


위의 글은 신시아 부조가 쓴 '희망의 신비'(비아출판사 2015년)를 참고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도 사람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