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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27. 2018

하나님도 후회하실까요?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앞뒤가 달라 모순처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님도 후회하시나요?”

그분은 성경 몇 구절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삼상15:11)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창6:6)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민23:19)


민수기 말씀에 식언치 않고 후회가 없으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무엘상이나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거나 한탄하신다는 말씀이 나오니 분명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이럴 때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전 이 질문을 받고 춘추시대 제나라에 살았던 관중과 포숙의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관중은 친구 포숙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일찍이 내가 가난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나는 내 몫을 더 크게 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세상 흐름에 따라 이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번번이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시대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터에 나가 세 번 모두 패하고 도망쳤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비웃지 않았다. 내게 늙으신 어머니가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어떤 상황에서도 관중을 믿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비방하고 험담하여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한 가지 가져야 할 원칙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모순처럼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 사이도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믿어 줄까요? 아니면 의심할까요? 그건 상대방에 따라 다르겠지요. 관중과 포숙처럼 진실한 친구 관계라면, 의심보다는 믿음을 가져야겠지요. 남들이 친구 관계를 깨트리려고 험담하거나 왜곡할 때도 있고, 내가 아직 친구의 상황을 잘 몰라서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오면, 먼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해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처럼 쉽게 변덕을 부리거나 뜻을 바꾸거나 후회하는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하나님께서 변덕을 부리든지, 뜻을 바꾸든지, 후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니느웨를 멸망시키겠다고 요나를 보내 선포하신 후 뜻을 바꾸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통고했다가 곧바로 뜻을 바꾸어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하기도 합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사실 인간인 제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국어를 번역할 때 직역해야 할지, 의역해야 할지 번역자들은 언제나 고민합니다. 모든 언어는 자기 상황과 문화 가운데 발달한 특유의 표현이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이 쓴 책을 보면 조선에 처음 온 선교사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중국, 일본, 조선은 모두 한자를 쓰고 있고, 또 ‘신’을 뜻하는 단어들이나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영어에 정관사를 붙여 ‘그 신’이라고 하거나 대문자를 써서 ‘하나님’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글자는 없었습니다. 조선에는 하늘의 으뜸 신으로 ‘상제’와 ‘하느님’이 있고 땅의 신으로 ‘땅님’이 있으며 그 밖에 다른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는 하늘의 으뜸 신인 ‘하느님’을 사용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천주교에서 이미 ‘상제’를 쓰고 있으니 그대로 사용하자는 쪽도 있었습니다.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결국 ‘하나님’으로 결정하였습니다. 한국어 중에 어떤 단어도 성경의 하나님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말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번역의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듯싶습니다.


사람의 언어를 번역할 때도 변경, 축소, 생략, 삽입, 왜곡, 오해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바꿀 때는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하나님의 무변광대(無邊廣大)하신 뜻을 밴댕이 속보다 좁은 인간의 언어로 바꿀 때,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낮추셔서 표현하였습니다. 마치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과 같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점을 생각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빗대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물질적인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지만, 눈과 손과 발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십니다. 이를 두고 신학 용어로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anthropomorphism)’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양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까지 가지신 것처럼 표현한다는 뜻이지요. 흔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고 할 때, 사람의 분노와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감정적으로 흥분하셔서 안 내도 될 화를 내시고, 도를 넘어서 분을 표현하시는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섭다거나 잔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말씀처럼 하나님은 인생(사람)이 아니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하여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할지라도, 사람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제한하여 해석하면, 하나님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답을 내리는 데 설명이 너무 길었나요? 이제 제 생각을 말해야 하겠군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처럼 후회하거나 변덕을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끝까지 확실하게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것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전 확신합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고백할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었구나.”


그런데 인간 편에서 보겠습니다. 우리는 아주 짧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해력과 예지력은 너무나 미숙하고 부족하고 잘못이 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해서 다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뜻을 바꾸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힘드실까요? 하나님께서 원칙과 법만 내세우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얼마든지 뜻을 바꾸신다고 생각합니다. 말 안 듣는 우리를 위하여 때로 후회도 하시고, 어르기도 하시고, 화도 내시고, 밀당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희생하기까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못할 일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서 사람 때문에 우시고, 후회하시고, 화내시고, 달래시는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감격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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