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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30. 2018

거룩이란 무엇일까?

전도사 시절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였다. 나는 부흥회 전에 찬양 인도를 하였다. 예배 시간이 지났는데도 강사 목사는 오지 않았다. 찬양 인도 시간은 한없이 길어졌다. 뒤에서 안내하는 교역자와 눈짓을 하면서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려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예배 시작 시간이 30분쯤 지나서 강사 목사는 천천히 등장하였다. 그의 머리는 기름을 발라 정갈하였고, 양복은 명품인듯 보기 좋았으며, 어깨는 힘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쉬었고, 거룩이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그는 성경을 풀어내기보다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유머나 축복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의 언어는 무례하여 교인을 하대하였고, 결론은 언제나 헌금 강요였다. 그는 설교를 통성 기도로 마무리하면서 전도사인 나에게 올라와서 기도 인도하라 하고선 축도도 안 하고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나는 속으로 욕이 터져 나왔다. 그는 부흥회 기간 내내 그렇게 하였다.


그를 보면서 나는 ‘거룩’이란 무엇일까? 생각하였다. 쉰 목소리에 점잖고 느릿느릿한 행동, 과장된 축복 기도, 위압적인 태도, 그런 것이 거룩일까? 구약 백성이 ‘거룩’을 깊이 있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바벨론 포로 시기다. 사실 레위기에서 거룩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졌다. 그들의 정체성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자아도취적이었다. 그들은 거룩(구별)의 의미를 깊이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종교의식을 형식에 잘 맞추어서 지키는 것이 거룩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처럼 제사 드리는 것에 정성을 쏟은 민족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였다.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은 제사장이 갖은 폼을 잡고 손을 휘휘 저으며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그 엄숙함과 경건함에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문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들이 행하는 종교 예식, 그들이 보여주는 거룩함에 하나님은 넌더리가 나셨다.


그들이 거룩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후였다. 그들은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1,440km를 걸어 바벨론에 도착하였다. 세계적인 대 제국 바벨론은 유대인을 압도하였다. 이슈타르 문과 지구라트, 공중정원은 예루살렘의 그 어떤 건물보다 크고 장엄하였다. 제국의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바벨론의 과학, 건축, 의료 기술은 탁월하였다. 유대인은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바꾸어야 했고, 언어도 새로 배워야 했다.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이 부딪친 문제는 정체성이었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인가? 우리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저 숨죽이며 바벨론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하고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은 곧 거룩을 새롭게 해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룩은 말 그대로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바벨론과 분명한 경계를 유지하고, 문화적으로도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가 1세기 신약 성도들에게 세상의 문화와 구별된 삶을 살라고 요구했던 것과 같다. 베드로는 말하였다.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다.”(벧전2:9) 거룩은 세상에서 도피하여 수도원으로 숨어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일같이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가는 세상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구별됨을 보여주어야 한다.  구별은 분리가 아니라 긴장이다.

고레스 칙령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로 거룩을 추구하였다. 그들이 추구했던 거룩은 분리였다. 이스라엘이 참으로 거룩하기 위해서 다른 민족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 설령 결혼했다 할지라도 과감히 이방 여인을 버려야 한다. 그들은 이방 여인을 추방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은 개와 같다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사방으로 높은 벽을 쌓고 자신은 구별된 백성이며 거룩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에스라 느헤미야서 뒤를 잊는 에스더서를 읽으면 거룩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본다. 에스더는 이방 왕과 결혼하고 페르시아 문화에 동화된 여인이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시각으로 보면 거룩과 거리가 먼 여인이다. 그러나 에스더는 민족이 위기를 당할 때 목숨을 걸고 동포를 구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것은 그녀가 신앙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그녀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았다.


참된 거룩은 세상과 분리되어 고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 세상 일에 깊이 개입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과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긴장된 삶이다. 한마디로 해서 ‘개입하되 순응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문화가 아무리 거대하고 화려하고 유혹적이라 하지만, 결코 그들 앞에 머리 숙이지 않는 삶이다. 세상의 문화가 속되고 부패한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꼴 좋다' 비웃지 않고, 비판할 때는 목숨 걸고 비판하고, 개혁하고 정화하는 일에 적극 개입하는 삶이다. 다니엘은 혼자 거룩한 척하지 않았다. 그는 세속 정부에 들어가서 활동하였다. 그렇지만 그들과 동화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을 유지하였다. 그는 벨사살 왕에게 생명을 내걸고 제국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거룩은 삶의 현장에서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교회는 거룩한가? 현대 그리스도인은 거룩한가? 혹시나 교회라는 성 안에서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부하며 종교의식에만 집중하지 않는가? 혹시나 세상에 나가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할 때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조롱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계시는가?"


초대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로마를 정복하였다. 그들이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쳐서가 아니다. 온 몸에 십자가를 휘감고 나가서 전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살았다. 세상 사람이 보고 깜짝 놀라 요동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지 않고, 자신들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 세상 안에서 살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그들은 삶으로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복음에서 가르치는 대로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실천하며 살았다. 말만 앞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교회 안 교제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신자, 약자, 나그네, 외국인, 타자, 낯선 이를 모두 뜨겁게 환대하고 사랑하였다. 때로 배신당하여도 그들은 변함없이 진실하였다. 세상 그 누구도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만의 삶을 보여주었다. 거룩은 종교적 경건이 아니다. 거룩은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환대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거룩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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