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변해야 한다.
장소에 대한 개념 정립이 아직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장소는 공간 속에서 인간이 가지는 특별한 유대감과 공간 속에서 서로 교제하고 교통하는 사회적 관계가 있을 때 장소라고 한다.
중국계 미국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 1930~)은 공간을 움직임으로 장소를 멈춤으로 이해한다. 공간은 의미 없는 영역으로 세상 어느 곳이나 모두 공간이다. 반면에 장소는 어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공간에 애착을 가지면, 그곳이 장소가 된다. 이런 식의 공간-장소 이원론은 1970년대 인문지리학에 빠르게 확산하였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 교통의 발달과 인터넷의 확산으로 이러한 개념도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성경 시대를 해석하는 데는 공간-장소 이원론이 여전히 유용하다.
나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에 애착을 붙이면, 의미 있는 장소로 된다는 개념을 성막 개념에 적용하고 싶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공간을 이동할 때마다 따라 움직였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자주 움직일 때도 있고, 한 곳에 오래 머물 때도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다. 사실 출애굽 경로를 연구하는 구약학자들은 수많은 가설만 주장할 뿐, 출애굽 경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약 백성은 어떤 지명, 어떤 위치에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구약 백성뿐만 아니라 당시 팔레스틴 인근에 살던 사람들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소의 이름도 특정하지 않았다. 광야는 그저 죽음만 가득한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의미를 둔 것은 광야라는 공간이 아니라 성막이라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성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성막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성막이 앞으로 나아가면, 그들도 재빨리 자신의 텐트를 철거하고 성막을 따라갔으며, 성막이 머무르면 그들도 거기 머물러 살았다. 성막은 삶의 중심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삶의 중심이었다. 광야의 삶은 하나님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삶이었다. 비록 위치를 자주 바꾼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문제는 전혀 없었다. 광야라는 특정한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의미 있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면 죽음으로 가득한 공간인 광야라 할지라도 문제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선 후 성막은 성전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움직임에 따라 언제든 같이 움직여야 했던 성막 생활은 이제 끝났다. 고정된 장소에 성전이 지어지면서 그들의 생각과 사상은 바뀌었다.
물론 솔로몬은 성전을 지은 후 ‘성막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그는 자기가 건축한 성전이라는 장소에 하나님이 거하시는데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온 천하 어디든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자신이 지은 성전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8:29)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무슨 일이 있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어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공간에 갇혀 계시는 분으로 규정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마치 현대 교회 예배당이 가지는 모순과 비슷하다. 오늘날 많은 목사가 하나님은 교회 건물에 살지 않다는 데 동의한다. 교회 건물은 단지 예배하는 공간일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 건물 로비에 이런 글귀를 흔히 볼 수 있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니 경외함과 정숙함으로 들어갈지니라.”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그곳을 신성시하면서 그들의 시선은 오직 예루살렘으로만 고정되었다. 어디를 가든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의 훌륭한 자세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형식과 제도와 직제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종교는 보이는 모습에 집중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상 어떤 건물보다 화려하고 크고 웅장해야 했다. 건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사역하는 제사장들도 최고의 위엄을 자랑하였다. 종교예식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외식과 교만과 형식과 자랑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야 했다.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셨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예루살렘에만 계시지 않고 여기에도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광야에서 어렵게 깨달은 진리를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다시 깨달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제사제도도 아니고, 종교의식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이었다. 어디에 살든 문제 될 것은 없다.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면 그곳이 바로 거룩한 장소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다.
스데반 집사는 마지막 설교에서 그 점을 분명히 밝힌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7:48).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의 마음속에 계신다. 고레스의 칙령으로 이스라엘에 돌아간 백성의 결정적 실수는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그곳에 하나님을 고착시키려 함에 있다. 그들은 결국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를 만들어 내고 자만심으로 가득한 바리새주의를 만들었을 뿐이다.
하워드 스나이드(Howard Snyder)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에서 교회 건물이 가지는 다섯 가지 사실을 이야기한다. 부동성(immobility), 경직성(inflexibility), 교제의 부족, 자만, 계층 분할이다. 복음은 ‘가라고’ 명령하지만, 교회 건물은 ‘머물라’고 한다. 복음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라’ 말하지만, 교회 건물은 ‘잃어버린 자들아 오라!’고 말한다. 교회는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대출금을 갚기 위해 교회 좌석을 채워야 하며, 교회 좌석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교인들을 독려하여 헌금액을 올려야 한다.
초대교회는 건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정집에서 모이든, 카타콤에서 모이든 공간은 중요하지 않다. 어느 곳이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하나님의 전이었다. 1세기 교회를 연구하는 로버트 뱅크스는 최초의 교회 건물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위한 건물은 3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초대 교회 200년 역사 동안 특정 교회 건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처음 지어진 교회건물은 로마와 그리스 가정의 손님맞이 방을 모델로 삼았다.” 초대교인은 교회 건물이란 장엄하고 화려하고 웅장한 곳이 아니라 친교와 환대를 위한 교제의 장소로 생각하였다. 그곳은 상하 계급이 없었고, 누구라도 마음 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려고 애를 쓰던 그리스도인이 서로 삶의 아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나누던 교제의 장소였다. 그곳에는 음식이 있었고, 그곳에는 위로와 감사와 기쁨과 격려가 있었다.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참고도서
1. 팀 크레스웰, '장소' 심승희 옮김, ( 시그마프레스 : 서울) 2012년
2.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논형 : 서울) 2008년
3.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새로운 교회가 온다', 지성근 옮김, (IVP : 서울) 2009년
4. 하워드 스나이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이강천 옮김 (말씀사 : 서울) 2000년
5. 로버트 뱅크스, '바울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이상' 장동수 옮김 (여수룬 : 서울) 199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