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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08. 2018

관용하라!

성경은 두 나라를 대조하여 보여준다. 하나는 세상 나라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다. 아브라함은 당대 최강국 메소포타미아(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일생 나그네로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당대 최강국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다 나와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다. 세계 최고의 전제국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였다. 온 세상을 정복한 로마에서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갔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 나라는 세계적인 제국이었다. 막강한 군사력, 엄청난 경제력, 전제군주 아래 획일화된 사회 제도. 


크고 위대한 세계 제국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지향했던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바와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들은 핍박받고 멸시받고 따돌림당하면서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썼다. 세상 제국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언제나 핍박과 멸시와 천대와 서러움을 겪었다. 


제국주의는 관용을 말하지만, 관용은 없었다. 오직 굴복과 복종만 있을 뿐이었다. 가끔 어떤 제국은 관용을 말하고 실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관용일까? 영화 300에서 그리스를 침공하는 대제국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외친다. “나는 관대하다.” 그의 관대함은 제국의 질서 아래 머리 숙이고 들어오라는 뜻이다. 너희 문화, 풍습, 제도, 종교 다 받아줄테니 굴복하라는 뜻이다. 이게 제국주의의 관용이다. 모든 제국주의는 획일성을 추구한다. 로마의 황제가 최고다. 로마의 정신, 로마의 제도, 로마의 법에 복종하라. 그들이 말하는 관용, 관대, 허용, 포용은 모두 제한적이며 따라서 선전구호에 불과하다. 


공자는 자로에게 군자와 소인에 대하여 말하였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논어를 해석한 책을 여러 권 뒤적이며 뜻을 찾아보았다. ‘논어는 처음이지’를 쓴 명로진은 ‘군자는 사람들과 화합하지만 생각 없이 휩쓸리지 않고, 소인은 생각 없이 휩쓸리지만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한다’로 해석하였다. ‘공자 논어를 말하다’를 쓴 김대선, 김영호는 ‘군자는 조화롭되 같이하지 않으며, 소인은 같이하되 조화롭지 않다.’로 해석하였다. ‘논어백가락’을 쓴 황병기는 ‘군자는 화합하나 서로 다르고, 소인은 서로 같으면서도 화합하지 못한다’로 해석하였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위의 해석이 다 옳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텍스트든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읽어야 처음 뜻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의 상황으로 곡해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신영복 씨의 해석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신영복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제후들이 전쟁을 통하여 천하를 제패하려던 춘추전국시대였다. 어떻게 해서든 힘으로 상대편을 짓누르려고 애쓰던 시대였다. 백성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개인의 도덕이나 양심, 바른 인간관계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권모 술수가 난무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자가 최고인 시대였다. 


공자는 그 시대 상황을 보면서 말을 하였다. 공자가 말하는 화(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다. 반면에 동(同)은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반대 논리다. 신영복은 이렇게 해석한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공자는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화(和)의 질서를 꿈꾸었다. 힘에 의한 패권주의에 빠져 통일 제국을 꿈꾸는 제후들이 공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당연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제국주의를 절대 추구하지 않는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거대한 제국 앞에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다. 로마 제국이든, 바벨론 제국이든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공동체를 한 번에 싹쓸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시하고 밟아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관용은 약자가 말하고 강자가 베푸는 법이다. 언제나 힘없고 비루한 자가 강자 앞에 관용을 구걸하는 법이다. 강자는 약자가 숨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허락하고선 ‘나는 관대하다’소리친다. 그게 지금까지 제국주의, 독선주의, 전체주의, 획일주의가 말하는 관용다. 


그런데 바울은 약자인 그리스도인에게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였다. 멸시받고 천대받고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을 실천하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자신을 짓밟는 자를 품어주라는 뜻이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이다. 

자신을 배반하고 등을 돌리는 자를 용서하라는 뜻이다. 


이건 루쉰의 ‘아Q정전’을 생각하게 한다. 루쉰은 아Q의 마음가짐을 ‘정신승리법’이라 이름 하였다. 모욕을 당해도 저항할 줄 모르는 아Q는 언제나 거꾸로 해석한다. 누가 자기 뺨을 때리면 자신이 너무나 훌륭하고 잘나서 시기하여 때린다고 생각하고 너그럽게 용서해준다. 무엇이든 자기에게 이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이다. 


바울은 ‘정신승리법’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전제하고 관용을 말하였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바울은 관용해야 할 이유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말은 이제 주님께서 오셔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를 회복하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강력한 제국주의 아래에서 힘없고 비루한 존재 같아 보이지만,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으며, 패하지 않으며, 반드시 승리한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삶이고 그리스도인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평가받을 항목은 세상 제국에서 어떤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고 누리며 살았느냐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떤 모습과 자세로 살았느냐?' 물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끝까지 고집부리며 싸우는 이유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여기서 끝장보려한다. 그리스도인은 아귀다툼하는 세상에서, 서로 잘났다고 폼 잡는 세상에서 경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은 잠시 있다 가는 곳이다. 이제 주께서 오셔서 영광스런 하나님 통치를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기쁨과 영광을 누릴 것이다. 세상의 허탄한 자랑, 제국주의가 주창하는 절대 권력과 무력은 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주님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고난과 모욕과 죽음을 이기셨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12:2) 

그리스도인은 세상 나라에서 겉보기에 약자 같아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보면 강자이다. 바람 앞의 먼지 같은 존재들 앞에서 어깨 힘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제국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민족주의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고, 자기 민족만이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남을 무시하기 일쑤다. 인종차별과 배타주의는 민족주의의 부산물이다.  제국주의는 하나의 제국, 하나의 제도, 하나의 법, 하나의 사상에 모두 굴복하라고 요구한다. 제국주의에 거치적거리는 사상이나 종교나 민족이나 집단은 한칼에 없애버리려 한다. 인류가 저지른 대량학살은 대부분 제국주의나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집단들이 저지른 범죄다. 히틀러, 스탈린, 르완다 학살의 주범 심비캉와,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 보스니아 내전의 인종청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불행하게도 이런 대량살상의 주역 뒤에는 언제나 종교가 자리하였다. 모슬렘, 불교, 회교,기독교 세상의 거대 종교들은 각기 독선적 사고행태를 보인다. 


제국주의 아래서 힘없고 나약한 존재로서 관용을 이야기하던 기독교가 세상의 권력과 힘을 가지자 관용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모든 생각과 사상과 종교를 단일화하려는 제국주의 사고방식에 함몰되었다. 타종교를 말하고 싶지 않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가 저지른 만행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관용은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똘레랑스(tolérance)’를 외친 것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끝내면서였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관용하며 평화롭게 살자는 뜻이다. 기독교가 관용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제국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만물은 다양성으로 충만하다. 인간의 환경과 문화와 생각과 종교 역시 다양함으로 가득하다. 하나님 없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사람과 생각과 종교가 차고 넘쳐난다. 하나님은 결코 획일화를 통하여 하나 되게 하지 않으신다. 기독교가 약자로서의 종교성을 다시 회복할 때에 관용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릴 수 있다. 


세상의 죄 됨을 인정하자.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자.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세상임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저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지 깊이 생각하며 살자. 바울의 권면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참고도서 

1. 신영복, ‘담론’ (돌베개:경기) 2015년 

2. 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임재서 옮김 (말.글빛냄:서울) 2007년 

3. 로이드존스, ‘항상 평안하라’, 김진우 옮김 (생명의 말씀사:서울) 1992년 

4. 폴 존슨, ‘2천 년 동안의 정신3 세계의 정신이 된 기독교’, 김주한 옮김 (살림:서울)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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