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1-2:4
저는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의 관계를 고민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사고체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한 제안이었습니다.
기독교 사고체계를 이야기할 때 크리스텐덤(Christendom, 기독교 사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텐덤이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교회와 국가가 하나 되어 나타난 정치, 종교, 사회적 현상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세상 권력을 등에 업은 기독교는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중심이 되면서 성경 보는 눈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성경 보는 눈만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 계급 구조를 본받게 되었고, 세상의 조직과 제도도 받아들였습니다.
권력을 가지면서 편한 게 많아졌습니다. 박해받던 자가 명령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모두 기독교에 머리 숙이고 들어오라고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거부하는 자는 법으로 혹은 힘으로 무릎 꿇렸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배 논리로 절대복종과 순종을 가르쳤습니다. 교회를 지으면 언제나 중심에, 혹은 제일 높은 곳에, 혹은 대로변에 지었습니다. ‘내가 중심이다.’ 기독교는 당당히 선언하였습니다.
거대한 제국이 주변 나라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듯이, 기독교는 그런 자세로 선교하였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앞에 무릎 꿇는 자는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잔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미국의 인디언들이,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남미의 백성이 그렇게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크리스텐덤적 사고방식은 수직적입니다. 하나님 - 천사 - 사람 - 동물 - 식물. 이러한 수직적 구조는 좀 더 들어가 보면 아주 세밀하게 구분됩니다. 사람도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서구 백인이 최고 자리에 있습니다. 돈 많고 권세 있고 많이 배운 사람이 최고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기복신앙과 성공신학을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성공하여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받고 축복받은 증거라고 설교하고 간증합니다.
이런 수직적인 사고 구조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 어떻게 될까요? 창세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시고 그에게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십니다. 수직적으로 이해가 되지요? 우리는 기독교의 수직적 사고 구조에 아주 익숙합니다.
사실 대한민국은 서구의 크리스텐덤과 아무 상관 없는 황인종이 모여 사는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입니다. 처음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 백정과 상놈과 여인들이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 안에 나그네 같은 주변부 인생과 버림받은 약자들을 위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점차 기독교가 지식인에게 퍼지면서, 수적 우세를 점하자 이 땅에도 크리스텐덤을 만들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백두에서 한라까지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여 이 땅이 크리스텐덤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복음 전파와 선교를 하자는 긍정적 의미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기독교의 수직적 사고 구조를 전파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습니다. 선교단체는 군대조직처럼 명령에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은 온몸과 마음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였고, 대한민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르게 크리스텐덤을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기독교는 권력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권력이 모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가 전하는 사고체계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이고, 제도적이고, 힘의 논리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창세기 말씀을 수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댓글을 보니 관리자형 인간, 하나님의 명령을 집행하는 인간,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인간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가르쳐온 결과입니다. 어떤 분은 부모의 마음으로 돌보고 관심을 두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혹은 서로 함께하고 협력하는 인간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연 만물을 사랑하는 인간을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조금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간이 세상보다, 자연보다, 불신자보다 한 단계 위에 있습니다.
이러한 크리스텐덤적 사고방식에 반발한 사람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 인간 - 세상의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제일 상층부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싫어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크리스텐덤의 수직적 사고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롭게 만든 것이 원형적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자꾸 그려 나가는 사고방식입니다. 인간과 가깝거나, 인간을 위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렇지 않은 것으로 점점 큰 원을 그리며 멀리 나갑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인본주의(Humanism)라고 합니다. 저는 인본주의(Humanism)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의 아류라고 생각합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바꾸었지,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입니다.
여기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제안합니다. 그는 리좀(Rhyzome)이라는 사고 체계를 주장합니다. 리좀은 땅속에서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뿌리의 줄기를 뜻합니다. 지상의 세계는 계급적이고 초월적인 구조를 가지지만, 땅속 세계는 상호 대등한 상태에서 각기 자기 길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평등한 관계입니다. 때로 이질적인 것과도 서로 얽히고설키지만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룹니다. 소위 통섭과 융합이지요.
들뢰즈의 리좀은 매우 복잡한 철학체계이지만, 저는 그것을 단순화하고 조금 변형하여 새로운 기독교적 사고체계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수평적이고 관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이고 조화롭고 평화로운 관계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잘 유지하도록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이러한 관계를 위하여 섬기고 희생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롤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지배자나 권력자나 권위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는 분입니다. 그분은 죄인을 위하여 기꺼이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기꺼이 생명을 바치는 분입니다. 관리자나, 명령자나, 다스리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런 위치에 계셨지만, 기꺼이 낮아져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아픔과 눈물과 서러움과 배신과 연약함을 체험하셨습니다.
1974년 복음주의 진영의 학자들이 로잔에서 선교대회를 열었습니다. 150여 개국 2,700여 명이 참석하여 열흘간 토론하고 예배와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2차 대회는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3차 대회는 2010년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독교 사상가들로 칼 헨리, 존 스토트, 프란시스 쉐퍼, 새뮤얼 에스코바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마닐라 대회에서는 ‘온전한 복음’(Whole Gospel)과 ‘온 교회’(Whole Church), ‘온 세상’(Whole World)이란 주제로 토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케이프타운에서는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온전한 복음’(Whole Gospel)과 ‘온 세상’(Whole World), ‘온 교회’(Whole Church) 였습니다. 순서를 왜 바꾸었을까요? 하나님과 세상의 중재자로서, 전달자로서 교회(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겠다는 결의였습니다.
창세기 말씀을 수직적으로나 원형적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제일 낮은 자리로 내려가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세상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선교학자는 현대 사회를 포스트 크리스텐덤(post-christendom) 사회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중심부에 있었다면, 이제 기독교는 변두리로 밀려났습니다. 서구 기독교는 주변부에서도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해졌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시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데도 일부 대형교회들은 아직도 중심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주변부에서 주변부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며 복음을 전파했던 초대교회 정신을 다시 살리지 않으면, 기독교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를 새롭게 보는 시각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