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비상계엄'에 이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집회를 신고하면 허가해 주겠다는 법이었지만, 사실상 허가하지 않기 위한 법이었다. 전제정권의 특징은 자신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반대세력이 될 것 같은 조짐이 조금만 보여도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 더 잃을 것도 없고, 내려갈 것도 없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질서와 체제를 위협할 요소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기에 집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식인이 모이고, 힘 있는 사람이 모이고, 돈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면 나쁘게 볼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러한 모임은 오히려 장려할만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체제를 전복하거나 세상을 바꾸자고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주변부 인간들이었다. 기득권이 볼 때 저들은 불만 세력이었다.
바리새인, 율법교사, 사두개인, 제사장 무리는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처치하고 싶어했다. 예수님만 죽이면 불만세력은 구심점을 잃을 것이다.
한 지혜로운 율법교사가 총대를 메고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덤벼들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 그는 영생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다. 시비걸기 위해서 물어보았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드디어 본격적인 도전을 하였다.
상황을 다시 설명하자면, 예수님 주변에는 사회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이 잔뜩 있다. 인도로 말하면 달릿(Dalit - 불가촉천민)이고, 미국으로 말하면 아시안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고, 한국으로 말하면 탈북자나 난민들이다. 중심부에 자리한 기득권층이 볼 때 그들은 이웃이 아니다. 그들은 기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요, 장차 분란을 일으킬 우려가 큰 자요, 쫓아내고 없이해야 할 자들이지 결코 이웃은 아니다.
이웃은 사회 질서를 잘 지키고, 문화와 문명을 누릴 줄 알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보수 우파여야 하고, 지식과 교양을 갖춘 자여야 한다. 율법교사가 생각하는 이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어야 하고, 율법을 알고 지키는 사람이어야 하고, 성전에 나와 규칙적으로 예배하는 자여야 한다. 결코,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처럼 집 한 채 없어서 성문 밖에 널브러져 사는 사람들은 이웃이 아니다. 그들은 차라리 지옥 불쏘시개가 되면 좋을 사람들이다. 저들은 사회의 암적 존재들이다.
스파르타인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그들은 설령 자기 자녀라 할지라도 건강하지 못하고, 어딘가 장애가 있는 것으로 보이면 가차 없이 절벽에 떨어뜨려 죽였다. 스파르타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유대인들도 이웃과 적을 확실히 구분하였다.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눈에 거슬렸고, 문둥병자 같은 사람은 소리쳐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으면, 돌로 치기도 하였다. 눈에 띄는 것도 싫고, 몸에 닿는 것은 더욱 싫었다.
율법 교사가 질문하였다. “누가 이웃입니까?”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웃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입을 주목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 개와 같이 여기는 민족이다. 지금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은 비록 거지고, 병자고, 장애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마리아인은 개다. 그가 선하든 선하지 않든 상관없다. 그 땅은 밟아서도 안 되는 땅이고, 그곳 사람은 상종할 수 없는 인간이다.
예수님의 비유가 주는 충격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그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기득권층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레위인은 중심부에 들어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도 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도 중심부에 있는 60평 아파트에서 떵떵거리며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개척교회를 벗어나서 대형교회는 아니더라도 500명 1,000명 교회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중심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사마리아인은 결코 유대 사회 중심에 설 소망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유대 기득권층에서 호의호식할 꿈은 꾸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는 개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누구도 배척하거나 멸시하거나 핍박할 이유가 없었다. 또 그럴만한 자격도 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사람, 사회에서 따돌림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 병들었다는 이유로 돌에 맞고 성문 밖에 살아야 하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친구로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다.
그렇다. 이웃은 낮은 자리에 내려가야 보이는 법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 가진 것이 있고, 안락한 집이 있고, 문화와 교양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웃은 극히 제한적이다.
다산 정약용은 권력싸움에 희생당하여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한때 정조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였다. 그가 아무리 백성을 생각한다 하여도 그것은 이론이었다. 그가 한양 땅에 있었으면, 결코 보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백성의 모습을 죄인이 되어 유배지로 내려가니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백성의 실상을 적었다.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린 것이 오늘로 며칠째다. 흉년으로 궁핍한 시절이어서 농부들은 밥 먹기조차 어렵고 나쁜 병마저 번져서 열에 일고여덟이 죽었다. 가난하다 보니 도롱이(우비)마저 없어 온종일 황토의 돌피 속에서 비를 맞는다. 저물녘이 되어 툭툭 털고 돌아와서는 아내가 내온 다 식은 보리밥을 억지로 먹는다. 흙방에는 불도 때지 못한 채 다 떨어진 자리를 깔고서 잔다. 날마다 이와 같으니 피와 살을 지닌 인생이 어찌 견딜 수가 있겠는가? 나라에서 거두는 세금이 모두 이 사람들 손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은 형편이고 보니 하늘 또한 어질지 않은 존재이다. 어찌 때에 맞게 개고 때에 맞춰 비를 내려주지 않는단 말인가. 계절의 차례가 순서에 맞게 되면 이 농사짓는 백성으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음으로 빌고 또 빈다.”(정민 선생이 엮은 ‘다산의 제자교육법’에서 )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백성을 다스려야 할 지방관을 위하여 '목민심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모든 백성에게 땅을 골고루 나누어주자는 '정전론'(井田論)을 주장하였다. 다산의 제안을 조선 정부가 받아들였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일본에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백성의 아픔을 돌아보았던가?
다산은 유배 생활을 했지만,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 멸시와 천대, 모욕과 괴롭힘을 당하다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셨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그분 자체로 구원이요 영생이었다. 복음이 무엇인가? 세상의 중심에 들어가 떵떵거리며 살자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러워 침 흘리면서 기도하자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다. 복음은 이웃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그들을 품에 안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