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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04. 2019

룻은 과연 신데렐라일까?

룻2:20


2003년도 미국에서 리얼리티 쇼 “백만장자 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꽃미남 불도저 기사를 귀족처럼 교육한 후 아름다운 성(城)을 소유하고 있고, 5천만 달러를 상속받을 프랑스 귀족으로 위장시킵니다. 방송국은 이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고 싶은 프랑스 여자들을 모읍니다. 그가 가짜인 줄도 모르고 수많은 여성이 지원했습니다. 백만장자와 결혼하여 인생을 바꾸어 보려는 것은 많은 사람이 동경하는 꿈인 것 같습니다.


룻기를 보면서 이러한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받던 룻이 백마 탄 왕자 같은 보아스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룻에게서 보아스 같은 사람을 만날 정당한 근거를 찾고 싶어합니다. 실제로 룻에게 좋은 성품이 참 많습니다. 그녀는 근면 성실하였고, 효심도 있었고, 신앙심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바로 그러한 룻의 성품을 강조합니다.


정말 룻기는 신데렐라 이야기일까요? 언뜻 보면 그렇게도 보일 수 있습니다. 룻이 처음 보아스를 만난 이야기를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이야기했을 때, 나오미는 보아스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마음씩 착하기로 소문난 부자요, 비록 먼 친척이기는 하지만 기업 무를 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기업 무를 자란 자기 집의 모든 빚을 청산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에게 백마 탄 기사가 될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때부터 나오미는 자신의 며느리와 보아스가 맺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보입니다. 21절 말씀에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이 나옵니다.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시어머니 나오미는 소년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버립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보아스는 소년이라고 했지만, 나오미는 소녀로 바꾸어 버립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소년들과 함께 있다가 자칫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보아스와 결혼하는데 지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마음속에는 이미 백만장자 보아스와 자기 며느리를 결혼시키기 위한 계획이 숨어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자신들의 가정과 삶에 해답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상황에 부닥쳤더라면 나오미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세속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럼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은 무엇일까요? 나오미가 의식하고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20절의 나오미 말 중에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하나님)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사실 이 말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말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할 때보다는 어려울 때, 괴롭고 힘들 때 하나님을 찾고 갈망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땅을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의 막막함은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그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는 광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부모에게서 버림받는 쓰라린 경험을 했지만, 그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접한 경험을 했습니다.(시27:10) 바울은 아시아의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는 경험을 하였지만, 환난 중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심과 도우심을 발견한 후, 자연스러운 신앙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도다.”


나오미가 말한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현대 그리스도인이 잊고 있는 진리가 하난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의 하나님, 순교자의 하나님입니다. 나오미가 말한 ‘죽은 자의 하나님’이란 말이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기독교에서 순교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순교자는 악의 권세 앞에 무력하게 죽은 희생자들이 아닙니다. 순교는 죽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은 자의 모습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고 위협하는 게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다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 심지어 생명까지도 빼앗아 가겠다는 협박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사단의 이 두 가지 시험 앞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공산치하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1.4 후퇴 때 고향 교회에 남아 계시고자 하는 장로님에게 아버지는 말하였습니다. “장로님 피난 갑시다.” “아니다. 내가 고향 교회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느냐? 난 다 산 늙은이인데 설마 공산당이 죽이겠느냐? 젊은 너희는 앞길이 구만리 같으니 어서 피난 가라.” 공산치하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공산당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장로님은 이미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향교회를 쳐들어온 공산당의 생각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교회당 앞에 서 있는 장로님을 보면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저 늙은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총과 칼이 무섭지 않은가?’ 장로님은 사단의 공격 무기 앞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영적인 힘이고 권세였습니다.


사단과 세상은 항상 자신들의 무기가 대단한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무기로 많은 사람을 유혹하거나 협박하였습니다. 사단이 오늘날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은 잘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거나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시험 앞에 굴복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룻기가 가르치는 것은 일확천금의 꿈이나 백만장자를 만난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죽은 자 같은 룻과 나오미를 외면치 않으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어려운 현실 속에서 좌절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은 성공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쓰러지고 넘어져서 가슴을 치고 있는 사람을 절대 외면치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들과 함께 울고 품어주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지 않았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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