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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31. 2019

초신자에게 주는 복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4강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예언의 말씀이라고 선언한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0:11, 19:10, 22:6-9에서 반복하여 이 말씀은 예언이라고 한다.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보아 사도 요한은 자신이 구약의 예언자와 의식을 같이하였다 . 구약의 예언자들은 자기의 영적인 능력으로 앞날을 예언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이 비록 환상을 보거나, 꿈을 꾸거나, 신비한 체험을 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탁월한 영적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자랑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체험에 대해 강조하지만, 구약의 선지자나 요한은 영적 체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다. 그것은 오늘날 신령하다 자랑하며 앞날을 예언하는 사람들과 분명 다른 점이다.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역사의 실제 상황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거나 도전한다(Gorman, 70). 하나님은 처음부터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역사를 이끄신다. 역사를 이끄신다는 말은 역사를 주관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율주행 자동차의 탑승자처럼 아무 하는 일 없이 운전석에 앉아계시지 않는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현 상황에서,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역사를 이끌어가실지 선언하는 내용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종말이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변화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시계 속에 가두어 버리는 잘못을 범한다. 그들은 그 시대의 악한 대상을 666으로 정하거나, 7년 대환란이나 천년왕국을 자기 시대의 한계 속에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들의 세계관은 운명론에 사로잡혀 있다. 세상의 운명론을 믿는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사주팔자를 보듯이 세대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을 운명론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였다. 하나님은 능동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사도 요한은 첫 번째 복에서 말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1:3).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는 누구인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금 이 편지를 읽는 첫번 독자는 초대교회 교인들이다. 아직 드러내놓고 교회 건물을 지을 수 없고, 교회 조직과 운영에 신경 쓸 여유도 없는 교인들이다. 신앙생활을 몇십 년씩 하면서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신자들이다(Barclay, 58).


이 말씀은 초대 교회 예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모임 때마다 누군가 일어서서 사도들에게 온 편지나 구약 성경을 읽어주었다. 짐작건대 낭송자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듣는 사람은 경건한 마음으로 낭송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다. 그 예배에 참여하는 자는 모두 복이 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초대 교회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실천이다. 비록 아는 것이 적고, 배운 것도 적지만, 현대 교인들과 비교하면, 그들은 생명을 걸고 말씀을 지켰다. 그들은 비즈니스를 위해 예수를 믿지 않았고, 정치를 위해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교양 때문에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실한 소망과 비전 때문에 믿었다. 

옥성득 교수의 블러그에서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15)

조선 최초의 장로교 목사 중 한 명인 서경조는 1925년 자신이 예수 믿게 된 과정을 고백하였다.

“예수교 할 마음이 깊이 들어가는 동시 그 교를 하면 피살당하리라 하는 마음이 또 생겨 심중전(心中戰)이 일어나는지라. 이는 이전에 조선에서 천주교인을 죽이던 일이 있으므로 나도 이 교를 하면 죽으리라 함이라. 그러나 예수를 믿어 속죄함과 구원 얻는 줄은 알지 못하더니 로마서를 많이 본 후 信이 贖罪(믿음으로 죄사함받는) 두 구절을 알았으나 심중전은 여전하여 믿을 마음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서로 싸우기를 거의 반년이나 수고하다가 사도 바울의 죽음을 무릅쓰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보고 내 생각에 바울도 사람이라 어찌 죽기를 두려워 아니하리오 하고 깊이 생각하다가 성신 받는 일에 대하여 생각이 나기를 죽는 것은 잠깐 동안이요 죽을까 두려운 마음이 실상 어려우니 성신을 받아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 없고 또한 살고 죽는 것이 천주의 뜻대로 되리라 하고 믿을 마음을 정하였으나 그래도 간간이 죽기 두려운 마음이 있어 성경을 많이 상고하여 보고 위로를 많이 받으니라”(서경조, 89-90)

서경조도 갈등을 오랫동안 하면서 마침내 생명을 걸고 신앙생활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초대 교회의 모습은 조선이나 1세기 교회나 비슷하다. 단지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를 뿐이다.


Gorman Michael J.,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Reading Revelation Responsibility), 박규태 옮김, 서울 : 새물결플러스, 2017년

Barclay William, 요한계시록 주석(The Revelation of John), 서울 기독교문사, 2009년

서경조,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 설립역사,”신학지남 7권 4호 (1925년 10월) 8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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