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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31. 2015

영조의 트라우마

영조의 트라우마는 출신 콤플렉스다.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출신에 대한 논란이 많다.

무수리 설이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이다.

무수리는 궁적에 등록된 궁녀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무수리는 ‘궁녀에게 세숫물을 갖다 바치는 여종’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몽골어에서 나온 말이다.

무수리란 표현이 고려와 조선에서는 궁중의 하급 여성 일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최숙빈, 김종성 지음, 부키, 85쪽)


김용숙 선생이 쓴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에 의하면 숙빈 최씨는 아마도 침방 내인의 하녀인 각심이가 아닐까 추측한다.

이는 숙종이 우연히 숙빈 최씨를 만나는 과정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가 나왔다.

숙빈 최씨는 쫓겨난 인현왕후를 위해 왕후의 생일에 상을 차려놓고 정성을 다할 때 숙종을 만나게 되었다.

출퇴근이 가능한 무수리와 달리 각심이는 침방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과 인간, 정병설, 문학동네, 34쪽 참고)


아무튼 영조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가 있다.

외가 친척이 전혀 없는 영조는 어머니 최씨 밖에 없었다.

그는 미천한 출신의 왕자로서 마음 툭 터놓고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


영조가 결혼하여 처음 신방에 들었을 때 신부의 손을 보고 한마디 했다.

“손이 참 곱다."

“귀하게 자라서 그렇습니다."

무심결에 대답한 정성왕후의 말이 자신의 출신 성분을 깔보는 것으로 보아서 정성왕후를 소박 놓았다.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왕비의 침소에 들지 않았다.  


영조가 자신과 아들, 손자에게 이르기까지 아주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 이유도 이러한 콤플렉스 때문이 아닐까?

기댈 데가 전혀 없는 영조는 어찌해서든지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는 조선의 이상적인 왕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 자녀도 자기처럼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히스테리칼할 정도로 아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다. 

자유분방한 아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였다. 

비극의 불씨는 그렇게 시작하였다. 


아들인 사도세자의 비극은 어쩌면 이런 출신 콤플렉스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숙빈최씨의 묘인 소령원(사적 제3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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