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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춤출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by Logos Brunch

현역에서 물러나면서 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았다. 어떤 친구는 나의 상황 변화와 관계없이 여전히 친구로서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였지만, 어떤 친구는 이내 내 곁을 떠나갔다. 나는 현역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큰지 미처 알지 못했다. 친구처럼 여기고 가깝게 지냈는데 사실은 친구가 아니었다. 마음으로 믿고 의지했던 친구에게 큰 상처를 받고 실망하였다.


인간에 대해 깊은 고민과 성찰을 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에 관심을 가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전은 목적론적이다.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설계되며, 그 목적을 달성할 때 선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 진정한 행복은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지 기분이 좋거나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서 가장 고결하고 가장 좋은 것을 성취하므로 오는 기쁨이라고 하였다(Evans, 277-278).


언뜻 들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은 듯 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은 ‘자유로운 그리스 남자’였다. 자유로운 그리스 여자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노예도 아닌 ‘자유로운 그리스 남자’였다. 그리스 남자는 위대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며 서로(자기들끼리) 우정을 나누고, 정치에 참여함으로 이상적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엘리트주의이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능력있는 사람, 목적을 성취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만이 인정받고 대우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기독교로 끌고 들어온 사람이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이 되어 종교적 신조 속으로 편입되고 이내 화석화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단자로 찍혀서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엘리트주의는 서구 사상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사람이라면 자기 스스로 서는 법, 자율성을 가지는 법,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길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능력을 배워야 했다. 니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초인이 되라고 했다. 최근 긍정 심리학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 측정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교육계에 엘리트주의를 가지고 들어온다. 인간의 행복도 평가할 수 있으며 그 점수에 따라 심리 치료를 한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평가하는 심리학은 그렇게 주류의 자리에 당당히 서게 되었다. 조금 약하면, 조금 문제가 있으면, 고민거리가 있거나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재빨리 치료에 들어간다. 긍정 심리학 이론을 제일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은 군대다. 사병들의 정신건강을 늘 점검하고 회복하고 강화(buildup)한다. 낙오자는 특별 관리를 한다.

완벽한 인간, 성공적인 인간, 문제없는 인간을 지향하는 현대인은 고달프다. 상대방이 평가하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평가하면서 절망에 빠진다. 인간의 행복, 인간의 독립, 인간의 자율성, 인간의 성취를 강조하는 사상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의 질병에 걸린다.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숨기고 홀로 극복하여야 하는 싸움이 힘들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늘 평가받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누구나 약하고 장애가 있다. 모두 다치기 쉬운 존재이고, 말하는 것만큼 살아내지 못하는 인간이다. 좋은 사회는 홀로 서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사회가 아니다. 좋은 사회는 약한 사람들이 서로 돕고 도우며 더불어 사는 사회이다.


20세기 위대한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나우웬의 친구인 파커 파머는 미국의 존경받는 교육 지도자이며 사회운동가이고 작가다. 그도 공동체, 리더십, 영성에 대해 강연을 하면서 ‘교사의 교사’ 또는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받는다. 그런 그도 우울증에 빠져서 크게 고통받았다. 많은 친구가 그에게 찾아와 위로하고, 격려하고, 훈계하고, 이끌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가 회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빌이라는 친구다. 그는 매일 오후 파커의 집에 들러서 파커를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긴 다음 삼십 분 동안 발 마사지를 하였다. 아직 감각이 살아 있는 신체 중 한 부분, 발을 만지는데 파커는 빌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빌은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말을 할 때도 충고 따위는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느끼는 파커의 상태를 말해 주었다. “오늘 네가 얼마나 힘든지 느껴진다.”라거나, “네가 더 강해지는 것 같은데.”라고 말하곤 했다. 파커가 늘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은 정말로 도움이 됐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다. 그 친구의 행동이 파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하다. 파커는 그의 책에서 빌에 대한 고마움을 깊이 드러내었다(Parker, 57%).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가 믿고 의지했던 친구들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도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에 불과하다. 잘못이 있다면 그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지 않고, 좋은 점, 잘하는 점만 보고 큰 기대를 하고 의지한 것이다. 늘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하여 말했으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다. 다시 한번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장애인 공동체 라르슈를 창립한 장 바니에는 말했다. “좋은 사회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서로에게 뭘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않고, 서로 자신이 더 낫다고 입증하지 않아요. 그 대신 공통의 인간성에 대해 숙고하고 우정을 만들어가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살고 함께 춤추면서 삶을 즐기게 해주는 사회예요.”


Evans Jules, ‘철학을 권하다’(Philosophy for Life and other Dangerous Situation) E-book, 서영조 옮김, 서울 길벗, 2012년

Palmer J. Parker, ‘삶이 내게 말을 걸어 올 때’(Let Your Life Speak) E-book, 홍윤주 옮김, 서울 : 한문화,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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