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새가 둥지를 지을 때 살펴보면 참 특이하다. 거친 나뭇가지를 가져다 둥지를 짓는다. 심지어 가시나무도 있다. 생각해보면 가시나무의 가시들은 둥지를 짓는데 서로 연결하고 견고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얼기설기 그물처럼 쌓아 놓은 나뭇가지들 위에 자신의 깃털로 둥지를 부드럽게 만든다. 깃털을 몇 개나 뽑았는지 모른다. 이제 곧 나올 새끼를 위해 어머 새는 한없이 노력하고 헌신한다. 둥지에는 어미 새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그것은 깃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깃털 밑에 숨겨진 거친 나뭇가지, 가시 나뭇가지에도 있다.
알에서 갓 부화한 새끼는 깃털의 부드러움 속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배가 고프면 입을 쫙 벌리고 어미를 기다린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어미는 새끼의 입속으로 맛있는 음식을 넣어준다. 맛있게 먹는 새끼를 볼 때 어미는 자기의 허기짐을 잊고 행복하다. 너의 배부름이 나의 배부름이다. 너의 잘됨이 나의 잘됨이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아무리 미물인 새끼라도 어미의 관심과 돌봄과 사랑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둥지 속의 새끼는 그렇게 어미의 사랑을 받고 날마다 건강하게 쑥쑥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미는 태도를 갑자기 바꾼다. 그렇게 쏟아붓던 사랑을 거두어 버린다. 깃털을 흩뜨려 날려버린다. 둥지는 이제 보금자리가 아니다. 밑에서는 거친 나뭇가지와 가시들이 쿡쿡 찌른다. 새끼는 어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어머니는 나를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찌를 때마다 새끼는 마음에 상처가 쌓인다. 나는 천덕꾸러기임이 분명하다. 나는 주어 온 자식이 분명하다. 그동안 부모를 신뢰하고 믿고 사랑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돌변할 수 있을까? 이것은 배신이다.
상처 받은 새끼는 마음속에 분노, 고통, 갈등으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그래 이곳을 떠나야지. 더는 어미를 믿을 수 없어. 나에게 주는 이 상처와 아픔을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날부터 새끼는 집을 떠나 독립을 꿈꾼다. 힘없는 날개를 푸드덕거리면서 이를 갈았다. '그래 떠날 거야! 떠나고 말 거야!' 어미는 새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중에서 푸드덕거리며 바람을 일으키고, 새끼들의 평온과 안락을 깨뜨리기에 여념이 없다. '좋아! 알았다! 내 떠난다. 이곳에서 떨어져 죽는 한이 있어도 내 떠난다! 이제 먹이도 내 힘으로 찾고, 둥지도 내가 알아서 새로 짓고, 어미와 상관없이 독립하리라.' 마침내 새끼는 날개를 크게 저으면서 비상한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사랑을 느끼는 곳은 가정이고, 제일 먼저 상처를 받는 곳도 가정이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부모에게 받는 상처 때문에 마음 깊이 괴로워한다. 나도 똑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났을 때 장수하라고 탯줄을 이빨로 직접 끊으셨다. 아버지 고향에서는 그런 풍습이 있었나 보다. 얼마나 내가 예뻤는지 물고 빨고 안아주고 사랑을 퍼부어주었다. 나의 기억 깊은 곳에 그 사랑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부모에게 받은 상처도 참 크다. 나를 때리고 야단치는 부모의 모습이 생생하다. 물론 잘되라고 하는 거였지만, 나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야속했다. 미웠다. 서글펐다. 나는 버림받은 것처럼 느꼈다.
흔히 부모의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데 나는 믿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아가페를 붙이기에 너무나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아가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고, 완벽한 사랑이고, 무한한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아가페 사랑은 무한하고 완벽하고 완전한 사랑일까? 그건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그건 명백히 틀린 말이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준 적 보다 들어주지 않은 적이 훨씬 많았다. 하나님은 나의 형편과 사정을 형통하게 하기보다 불통하게 할 때가 더 많았다.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온전히 채워주지 않았다. 나는 만족보다는 불만족했고, 행복보다는 불행에 더 가까웠다. 나는 보호와 돌봄과 사랑받기 원했는데 오히려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더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완전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단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흠결이 하나도 없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사람은 편협하기 일쑤다.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생각할 때 비로소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룰 수 있고 더욱 풍성한 이해를 할 수 있다. 나아가 하나님의 입장까지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온전한지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 형제나 자매, 배우자나 친구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지 않더라도, 각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통로이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이 숨어 있다. 우리를 비상하게 하려고,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의존적이 아니라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놀라운 사랑이 숨어 있다.
장 바니에는 우리 주변에 두 개의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한 손은 말한다. “내가 널 안전하게 붙들고 있다. 너를 사랑하는 까닭이다. 나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다른 한 손은 말한다. “가라, 내 아이야, 가서 네 길을 찾아라. 실수하고 배우고 아파하고 성장해라. 그리하여 네가 되어야 할 사람이 되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자유다. 그리고 나는 늘 네 가까이에 있다.” 이 두 손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의 손이다(Nouwen, 43%).
깃털이 사랑인 만큼 가시도 사랑이다.
관심과 돌봄이 사랑인 만큼 외면과 내침도 사랑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0-11).
Ulmer Kristen, ‘두려움의 기술’(The Art of Fear) E-book, 한정훈 옮김, 서울 : 예문 아카이브, 2018년
Nouwen Henri J.M., 분별력(Discernment) E-book, 이은진 옮김, 서울 : 포이에마,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