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복음의 능력

복음과 영적 전쟁 5

by Logos Brunch

예전엔 동네마다 굿이 열리곤 했다. 굿 판은 좋은 구경거리였다. 한 손엔 부채를 다른 손에는 무당 방울을 들고 덩더꿍 춤을 추면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목사 아들이지만 신기한 구경거리를 놓치기 싫어서 담장 너머로 발돋움 하여 나도 쳐다보았다. 한동안 춤추던 무당이 갑자기 말했다.

“여기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느냐!

예수쟁이 때문에 신 내림이 안된다며 '가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괜히 오금이 저려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생각하니 나 같은 어린 크리스천이 있다고 신내림이 안 된다는 게 이상하였다. 무당의 영적인 능력이 약한 건지, 아니면 귀신이 나 같은 어린 크리스천이 무서워 오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무당은 별로 신통하지 않은 것 같았다.


찰스 크래프트는 그의 책에서 사단에게 사로잡혔다 풀려나 예수를 믿은 여인의 고백을 기록하였다.

“그녀는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는 동안,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영적인 능력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십 리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엄청난 능력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큰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깨닫기만 한다면”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Kraft,205-6).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시하였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귀신은 알아보는 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불신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다(요 1:12, 6: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모르는 것 같다.

miguel-bruna-TzVN0xQhWaQ-unsplash.jpg

바울은 로마서에서 선언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얼마나 큰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한다. 복음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능력자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소유한 자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자들이다. 이 사실을 어설픈 무당도 아는데, 오직 그리스도인만 모르는 듯하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큰일이고, 가장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셔서 구원하는 능력을 우리 안에 베푸셨다. 따라서 우리도 남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임 받기에 넉넉하다.


복음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 1:5).

오늘날 기독교가 말의 권세와 능력을 잃어버리고 공허한 말 잔치만 일삼다 보니 복음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잊어버린 듯하다. 손에 강력한 영적 무기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는 모양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할 위대한 복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시작하였고, 반드시 일을 이루신다. 더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주저앉아선 안된다. 세상의 작은 공격에도 할 말을 잃어버리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하나님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손에 차꼬를 차고 있어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아그립바 왕과 그의 신하들 앞에서 당당하게 소리쳤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


바울만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초대 교회 성도도 당당하였다. 수많은 불신자들 앞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도 그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비굴하지도 않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작은 계집종 앞에서 두려워 떨던 베드로, 거듭나기 전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한 사람의 진실한 그리스도인, 당당한 그리스도인을 안타깝게 찾고 계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1. Charles H. Kraft, ‘능력 그리스도교(Christianity With Power)’, 이재범 옮김, 서울 : 나단 출판사, 2006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균형잡힌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