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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잡힌 세계관

복음과 영적전쟁 4

by Logos Brunch

아버지는 6·25 전쟁 중 1.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오셨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하였다. 하루 두 끼 먹기도 벅찬 그 시절 아버지는 목회자 없는 교회에서 평신도 사역자로 일하다 전도사가 되었다. 아버지가 사역하던 교회는 침례교회로서 정식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사역자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집안을 먹여 살리는 일보다 주의 일을 하는 데 더 열심이었다. 공산치하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꿈꾸었던 아버지는 생명을 바쳐 헌신하였다. 아버지의 헌신을 점검하기 위해서인지 어느 날 장티푸스에 걸렸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주일날 설교를 겨우 마쳤다. 저녁 예배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 교인들에게 자체적으로 예배드리라고 부탁하였다.


점심도 먹지 못한 채 방안에 누워서 끙끙 앓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배 전도사! 있어?”

“누… 구세요?”

몸을 일으키기도 힘든데 손님이 오다니 난감하였다. 누운 체 문을 겨우 열었는데 옆 동네 전도사가 미안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어! 웬일이야? 들어오게.”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방 안에 앉은 친구 전도사는 대뜸 무릎을 꿇고 부탁하였다.

“여보게 배 전도사 내가 긴한 부탁이 있어 왔어.”

“무슨 부탁인가?”

“우리 교회에서 이번 주부터 서울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이분이 갑자기 오늘 연락이 왔어.

부흥회 약속이 이중으로 잡혀서 도저히 올 수 없다는 거야.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

교인들에게 부흥회를 한다고 몇 주 전부터 광고를 했는데 오늘에서야 못 온다니. 내 참!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이번 부흥회를 해주면 어떤가?

내 부탁할 사람이 없어 자네를 찾아왔네.”

아버지는 말하였다.

“이보게 내 모습을 보고 내 머리를 한 번 만져보게.

지금 내가 열이 40도를 오르내리고 있어.

오늘 주일 저녁 예배도 교인들 보고 자체적으로 드리라고 했던 참이야.

더욱이 나는 부흥회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건강이 좋아도 할 수 없을 텐데 내 몸이 이렇게 되어서 어찌할 수 있겠는가!”

난감한 친구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보게 그럼 모여든 교인들 보고 강사가 오지 않게 되었으니 돌아가라고 할까?

자네 마지막으로 내 부탁함세. 제발 와서 말씀을 전해주게.”


아버지는 그 순간 번뜩 이북에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기도가 떠올랐다. 공산당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롭게 설교하다 죽었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아버지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드디어 설교를 마음껏 하다 죽으라고 하시는가 보구나.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내 오늘 설교하다 죽으리라. 아버지는 아픈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그럼 가지.”

친구 전도사는 아버지의 성경 찬송을 얼른 챙겨서 가방 안에 넣고 앞장섰다. 아버지는 90 넘은 할아버지처럼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걸음 힘겹게 걸었다. 앞장서 걷는 친구는 신이 나는지 성큼성큼 걸으면서 아버지를 재촉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아픈 것을 다 잊은듯하였다.

“빨리 오게. 젊은 사람이 뭐 걸음이 그리 늦나.”

신음이 저절로 나오는 아버지는 대꾸할 힘도 없었다. 그렇게 고개를 넘고 넘어 시오리 떨어진 친구 교회로 갔다.


친구 교회 교인들은 새로운 강사가 올 것인지 염려가 되어 동구 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보자 냉큼 달려와 아버지를 인도하였다. 한 권사님이 오셔서 “저녁을 뭐로 하실까요?”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 생각 없이 고향에서 늘 즐겨 먹던 평양냉면을 부탁하였다. 고열에 시원한 평양냉면을 먹으면 열이 조금이라도 내려갈 듯하였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냉면을 먹고 체하였다.

딱 죽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오늘 정말 나를 죽이실 모양이구나.’ 친구 전도사와 교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오늘 이 교회에서 죽으리라’ 결심하였다.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아파 견디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강대상에 선 아버지는 설교하기 시작했다. 부흥회를 해 본 적도 없고, 특별히 설교 준비를 한 것도 없어서 아버지의 설교는 즉흥적이었다. 평소 말씀을 보고 묵상하던 것을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강대상을 붙잡고 겨우 버티고 서 있는 아버지는 진액을 쏟아 놓았다. 생명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나니 무서울 게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죽으리라. 죽으리라. 주를 위하여 죽으리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얼마나 설교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도 잊고, 몸의 상태도 있었다. 생사를 앞에 둔 아버지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창문 밖에서 “꼬꼬댁”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교인들도 닭 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분명 설교를 저녁에 시작했는데 창문 밖으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아침이었다. 그날 아버지와 교인들은 시간을 잊어버리는 체험을 하였다. 놀라운 일은 아버지의 모든 병이 그 저녁 예배 시간에 인사도 없이 떠나가버렸다. 일주일 동안 집회는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병자들이 치유를 받고, 마음의 상처가 있던 사람들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교인들은 울고 웃었으며, 기뻐하고 통곡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때로부터 아버지는 졸지에 부흥사가 되었다. 말씀만 증거해도 병자들이 낳았고, 기적이 일어났다. 교인들은 줄지어 안수해달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충청도를 시작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활동은 주변 목회자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침례교 신학은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로 끝났다고 가르쳤다. 목사들은 지방회로 모여서 아버지의 성령 집회를 견제하였다. 두 번 다시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일을 하면 제명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시골 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던 아버지로서는 곤혹스러웠다. 지방회에 끌려간 아버지는 앞으로 안수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말씀을 증거 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선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다. 목회자들은 갑론을박 시끄럽게 논쟁하였고, 아버지의 문제는 계속 주시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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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야기 속에는 영적 전쟁을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세계관)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양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것과, 아프리카 그리스도인의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어떤 문화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예를 들어 파푸아 뉴기니에서는 돼지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완전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며 아무도 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어 주지 않는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선 부모가 없는 고아는 거의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며 경멸의 대상이 된다(Kraft,137).


비록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할지라도 여전히 세속 문화의 그늘에 잠겨 시각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다. 영적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세계는 물질세계, 인간 세계, 영적인 세계가 있다. 물질세계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 마치 성경을 이론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세계를 무시하고 이성과 논리로만 신학을 세우는 자들과 같다. 이들은 영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애써 외면하고 부정한다. 눈 앞에 영적인 일이 벌어져도 오히려 무시하고 억누르려 한다. 반면 모든 것을 영적 세계로만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 물질의 세계 곧 육의 세계 역시 중요하다. 바울은 자신의 몸이 영을 이기고 제멋대로 나아가는 것을 염려하였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엡 4:22)

그는 자신의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알았다(롬 7:18-19). 그는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하게 하였으며(고전 9:27)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다(고전 15:31). 육신의 일, 물질의 일을 가볍게 보는 사람은 육으로 망하는 길로 들어서기가 쉽다. 찰스 크래프트는 물질세계, 인간 세계, 영적인 세계의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풀러선교대학원의 김철수 교수는 Arnold의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직면하는 세 가지 원수(육신, 세상, 사탄)를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편협한 시각으로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여 문제를 크게 확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원인 대부분을 지나치게 마귀나 세상이나 육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김철수, 13). 우리는 영적 전쟁을 수행함에 세상의 편협한 가치관에 경도되지 않고 바르고 균형 잡힌 성경적 관점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헌신의 대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영적 현상은 단순히 영적인 세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숨 쉬는 물질세계, 육의 세계에서도 일어나며, 동시에 영적 전쟁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사람 자신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려 하며, 사단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단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무기는 다 동원할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영적 전쟁은 진리, 능력, 충성 대결로 이해해야 한다.


1. Charles H. Kraft, ‘능력 그리스도교(Christianity With Power)’, 이재범 옮김, 서울 : 나단출판사, 2006년

2. 김철수, ‘Power Encounter Lecture Notes(for Fuller MO507),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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