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행 9:8). 그 후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할 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행 9:18).
이 사건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죄는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킨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면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속였다(창 3:5). 그러나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이 어두워졌다. 전에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던 사람이 이제 욕심을 보게 되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게 되었다. 사단은 시각의 변화를 유도한다.
회심은 우리의 어두운 눈이 열리는 사건이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철저한 방향의 전환, 즉 완전한 재방향설정(reorientation)을” 하였다(Nissen, 163).
회심하기 전 바울은 율법 준수를 강조하던 열광적인 유대인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율법으로 평가하였다. 법을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그의 기준은 확실하였다. 유교도 예의 도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회심하기 전 바울처럼 모든 것을 규례와 규범으로 평가하고 판단한다. 법을 강조하는 사람은 차가울 수밖에 없다.
회심한 이후, 바울은 율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였다. 전에 율법을 자랑하였지만, 이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자랑하였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바울은 이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사람은 심판과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로 감싸 안아야 할 대상이었다.
회심하기 전 바울은 유대 민족만 보았다.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타민족은 개와 같이 여기는 전통적 유대인이었다. 그는 이방인과 상종하기를 싫어하였다. 사실 그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교의 정신을 훼손하고, 타락시키는 진보적인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전통과 율법과 규례를 깨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바울이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할 수만 있으면 잡아 죽이려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전통 유대교의 회복을 소망하였고, 그 일이 자기의 소명이라고 생각하였다.
회심한 후 바울은 하나님의 세계 비전과 마음을 보았다. 유대인만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란 사실을 발견하였다. 문제는 이방인이나 전통을 깨트리는 유대인이 아니라, 율법을 고집하며 벽창호같이 꽉 막힌 전통적 유대 민족주의자, 바로 바울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삶의 방향과 목적을 바꾸었다. 그는 이방의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그는 불신 세상으로 과감히 나아갔다. 정죄하고 판단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품고 사랑하며 구원하려고 나아갔다. 그렇게 그는 이방의 사도가 되었다.
회심하기 전 바울은 명예와 성공을 목적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문을 공부하였다. 그의 스승은 모든 유대인이 존경하는 가말리엘이었다. 짐작건대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 중 최고였을 것이다. 그는 고백하였다. “나는 …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 3:5). 가만히 있으면 그는 가말리엘의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유대인에게 존경받는 율법 선생이 되었을 것이며, 명예와 부와 성공이 예약된 사람이었다.
회심한 후 바울은 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는 세상의 성공과 명예와 부를 버렸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였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미쳤다고 하였다. 그들이 볼 때 바울은 헛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말하였다.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 그러나 바울은 보았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보았다. 세상의 역사는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이나 로마 황제가 이끄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고 비웃지만, 역사를 마감하는 날 분명하게 결론 날 것이다. 바울은 그날을 바라보았고,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였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역사 인식이 바뀌었다.
“바울은 가치와 자기 인식(self-definition), 충성에 있어서 철저한 변화를 겪었다”(Bosch, 217). 영적 전쟁은 관점(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의 전쟁이다. 어떤 눈으로 인생을 보고, 역사를 보고, 세상을 보느냐의 싸움이다. 어떤 가치에 더 무게를 두느냐의 싸움이다. 현대 교회는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 혹여나 회심하기 전 바울처럼 세상의 성공과 명예와 부에 가치를 두는가? 혹시나 자기만의 세상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지 않는가? 말로만 성경의 가치, 하나님의 비전을 이야기하지 실상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간청하였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계 3:17). 오늘 한국 교회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요청하셨다.
바울의 회심은 눈이 열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바울만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하는 사건이다. 회심하였다고 하면서 아직도 눈이 열리지 않아 세상을 추구하고, 세상이 이끄는 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Nissen Johannes, 신약성경과 선교(New Testament and Mission), 최동규 옮김, 서울 : CLC, 2005년
Bosch David J., ‘변화하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 김만태 옮김,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