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는 흩어짐의 역사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하셨다. 보통 학자들은 ‘충만하라’를 뒤따라 나오는 ‘번성하라’와 연결하여 단순히 이 땅에서 잘 되고 번성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창세기부터 하나님께서 번영 신학, 성공 신학을 말하고 있을까?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끊임없이 흩으신다.
성경은 흩으심을 중의적으로 사용한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하거나, 동생을 죽인 가인을 땅에서 방랑하는 자가 되게 하거나, 바벨탑 사건 후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 지면에 흩으실 때는 징벌적 요소가 강하다. 반면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떠나게 하므로 그 후손을 유목민이 되게 한 것은 사명적 의미가 강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늘 강조한 사실은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24:22)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타국인으로, 종으로, 약자로, 소외자로 온갖 설움을 겪으며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고아와 과부, 외국인과 종을 사람 대접하는 나라를 만들라고 하셨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 만들기를 거부하고 세상과 같은 나라 만들었을 때 바벨론을 들어 망하게 하고 다시 흩으셨다. 에스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모두 강제 이민자였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초대교회는 그러한 명령을 따라 세상에 흩어져 나그네로, 타자로, 이민자로, 소외자로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러한 노마드의 삶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성경이 베드로서다. 하나님은 흩어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흩어진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자세와 방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신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노마드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노마드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이다. 들뢰즈는 유목민을 연구하였다. 유목민은 단순히 이동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면서 사막이나 초원처럼 불모의 땅을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정착민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 땅을 확장하려고 경쟁하고 싸우는 사람이라면 유목민은 기존의 고정관념과 위계질서에서 해방되어 기존의 세속적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불모의 땅도 마다치 않는다. 오히려 그런 땅을 더 선호한다.
광야와 같은 땅을 바꾸어,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만한 땅으로 창조하는 사람이 노마드(nomad)이다. 노마드는 흩어짐이나 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모의 땅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흩어진다. 그들은 기존 사회에서 중심이 되고자 아등바등하지 않으며 오히려 전혀 새로운 세상, 누구라도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들뢰즈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노마드를 말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노마드 사상을 이야기할 때,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였다. 또한, 세상에서 중심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번영과 성공을 꿈꾸는 한국 기독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수 만 명이 모이는 대그룹일까? 대그룹에서 과연 인격적 교제와 삶을 나누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소수였고, 나그네였고, 타자였다. 평생 떠돌며 살아야 했던 아브라함, 애굽의 노예로 핍박받는 타자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 포로가 되었던 에스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땅끝까지 흩어져야 했던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공동체, 어떤 교회를 이루고자 했을까?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끊임없이 도전하신다. 너희는 이 세상 나라 사람이 아니다. 너희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비록 몸은 이 땅에 살지만,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를 창조적으로 세워가야 한다. 세상에서 번영과 성공을 목적 삼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삶을 단순하고 간소하게 하면서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언제라도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고, 언제라도 새롭게 개척할 준비를 하라고 도전하신다.
오늘 우리는 다인종, 다문화, 다 언어 환경에 살고 있다. 현재 세계 인구의 1/6이 노마드로 이동하며 산다. 생존을 위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그중에 복음을 들고 세상 속에서 변혁을 꿈꾸며,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사명, 초대교회가 받았던 사명을 따라 어떤 곳에서든 그곳을 재창조하여 함께 더불어 살며,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나눌 수 있도록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희망이다.
베드로서는 명백히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쓴 편지이다. 나는 베드로서를 쓴 목적에 충실하게 읽어보려고 애를 썼다. 어쩌면 베드로서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흩어짐이라는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 제목에 ‘노마드’라고 정할 때 조금 고민하였다. 기독교에서 즐겨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목사님이 인문학 용어를 사용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신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인문학을 열심히 가르쳤다. 인문학은 세상과 소통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한 중요한 통로 중 하나가 인문학이다. 기독교가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 논리로 그치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다.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려면 인문학을 포기해선 안 된다. 비록 ‘노마드’란 용어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성경 속 노마드’란 제목이 가진 의미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부족한 책이지만 도전과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