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있든 모든 그리스도인은, 문화적 배경이나 신학적 교파가 어떠하든지, 언젠가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친지, 친구, 이웃을 향한 그리고 실제로 비기독교 세상 전체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인가?" - 존 스토트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 전파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겨주셨다. 그 사명은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적선하듯 베푸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은 사람을 우리는 흔히 ‘대사’(ambassador)라 부른다. 그러나 ‘대사’라는 말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서 ‘대사’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를 대표하여 외교교섭을 하며 자국민에 대한 보호와 감독을 수행하는 높은 직책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대사는 보냄 받았다는 면에선 같지만, 실천적 모습은 완벽히 다르다. 하나님 나라 대사로 대표적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늘 보좌에서 천하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그러나 대사로 이 땅에 오실 때 주님은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고, 죽는데까지 낮아지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 것 같이”라는 말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결코, 세상 나라의 대사로서 위세 부리는 모습으로 보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낮은 자리에서 섬기므로 드러내라고 보냄 받은 자들이다. 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하나님의 보내심은 낮아지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12:1)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경계인으로, 나그네로 낮고 천한 자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이나 후일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도 모두 그들이 서야 할 자리가 어떤 모습인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큰 착각 속에 있는 듯싶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대형교회들의 재력과 위세는 대단하기 때문이다. 선거철만 되면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몰려와 머리를 조아리고, 많은 사람이 도움을 요청한다. 낮은 자의 모습이 되고 싶어도(설령 그런 생각을 하는 지도자가 혹 있을지라도) 세상은 교회를 가만 두지 않는다. 돈과 많은 사람을 동원하는 교회 지도자를 높이는 데 익숙한 자들이 세상이고, 그러한 세상에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죄된 속성을 가진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가진 자로서, 높은 자리에서 베풀고 나누어주는데 익숙해져 있다. 선교나 전도도 행사로 끝날뿐 낮은 자의 삶은 실종되었다. 트리니티 신학대 조슈아 지프 교수는 경고하였다. "권력과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가 베푸는 환대의 수혜자들로 생각할 유혹을 받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그릇된 우월감을 갖게 될 수 있다"(Jipp, 175).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었던 사실을 잊어버렸을 때 망했던 것처럼, 한국 교회가 “보냄 받은 나그네의 신분”을 잊어버릴 때 망할 수밖에 없다. 교회가 "나그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풍조에 휩쓸릴 때 기독교는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막6:8-9)하신 이유는 낮아지라는 뜻이었다. “땅끝까지” 흩어져 나그네로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의미도 낮아지라는 뜻이다. 그것은 낮은 자세와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실제로 낮아지라는 뜻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섬기는 자들이다. 불신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자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진심을 담아 복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건 가진 자가 아니라 없는 자로서,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초대 교회 교인들은 나그네로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환대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 공동체에는 싸워야 할 이권도 없었고, 재산도 없었다. 오직 진심만 있었다. 하나님의 진리는 가슴으로 전달할 때, 비로소 받을 수 있다.
단지 교회에 데려오기 위해서나, 단지 예수 믿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불신자들은 이용당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크리스천이 된 한 모슬렘의 고백이다. “수많은 이들이 나를 제자로 삼아 훈련하려고만 했지 내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Woodberry, 171). 많은 그리스도인이 제자화란 복음(진리)을 전달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제자화는 어떤 내용을 가르치느냐에 결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관계를 나누느냐로 결정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지금 한국 교회는 자신이 부자라고 착각하고 있다. 아니, 실제로 부자(돈, 건물, 권세,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는 부자)이기도 하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1. John Stott and Christopher J.H.Wright, ‘선교란 무엇인가’(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 김명희 옮김, 서울 : IVP, 2018년
2. Joshua W. Jipp, '환대와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 송일 옮김, 서울 : 새물결플러스, 2019년
3. J. Duddley Woodberry, ‘씨앗에서 열매로’(From Seed to Fruit), 김아영 옮김, 서울 : 좋은 씨앗,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