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만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페친이 나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주었다.
정성스럽고도 따뜻한 크리스마스 카드에 난 감동하였다.
당시 한국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해서든 축소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카드는 낭비고 선물은 부담이다.”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크리스마스 카드나 새해 연하장은 카톡이나 메신저로 대신하자."
철저하게 자본주의 논리로 크리스마스에 나누어야 할 감사의 인사를 가볍게 만들었다.
사실 한국은 감사하는 훈련을 하지 않는다.
마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라 가르쳤다.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는 졸업식이나 어버이날 한 번 거론하면 그걸로 충분한 줄 여겼다.
미국은 감사(Thank you for ~)를 훈련하는 나라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것 하나에도 무의식적으로 감사가 나오도록 가르친다.
현재 출석하는 교회 옆으로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주택 단지 도로가 있다.
길은 한 5도쯤 경사가 나 있다.
주일날 교회 앞에서 잠시 산책하는 데 위에서 어린아이 둘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형은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고, 동생은 7살쯤 되어 보였다.
아직 미숙하지만 경사 난 도로를 따라 아이들은 신나게 내려오고 있었다.
교회를 지나치면 바로 큰 도로가 나오기 때문에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다.
큰 도로 20미터 전쯤 커다란 오크나무가 있었는데 아이들 뒤로 아빠가 소리쳤다.
“얘들아 오크나무에서 서라!”
살짝 염려가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먼저 내려오던 형은 오크나무에서 정확히 멈추었다.
뒤따르던 동생도 형을 따라 멈추었다.
뒤에서 아빠가 큰 소리로 말했다. “THANK YOU!”
나는 아빠의 마음이 느껴졌다.
멈춘 아이들은 아빠의 "Thank You"에 화답하듯 “Thank You” 하였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난 그 장면이 마음에 와서 꽂혔다.
한국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감사보다 걱정과 염려가 앞서 야단이 나오지 않았을까?
아빠의 말을 들어주어 “감사”하고 아빠가 감사라고 했기에 아이들도 따라서 “감사”라고 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다음 해 미국에서 또 카드가 왔다.
난 살짝 고민하였다.
어떻게 할까?
난 감사보다 염려와 걱정이 앞섰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난 그만큼 감사에 미숙하였다.
그래서 메신저로 답하였다.
“앞으로 저에게 카드 보내지 말아 주세요. 부담됩니다.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그렇게 쓴 것 같다.
그때엔 난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 와서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게 되었다.
“감사”해야 할 일을 오히려 “부담”과 “염려”로 바꾸어버렸다.
카드를 보낸 분이 얼마나 무안했을까?
그 후로 난 그분에게 사과의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지내면서 감사의 인사를 주고 받는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난 아직도 미국의 감사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아닌가?
미숙하지만, 부족하지만 감사를 연습하고 살아야겠다.
로고스 교회 신 목사는 나에게 말했다.
미국에 와서 살 때에 SAT 점수만 잘 받으면 된다고 하였다.
"SAT가 무어냐?" 물으니 “Sorry and Thank You”란다.
미국 생활을 익히는 첫 번째 단계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겠다.
다행히 카드를 보낸 미국 페친은 여전히 나를 팔로우하면서 좋아요를 누르며 격려하고 있다.
정식으로 사과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Sorry and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