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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Feb 26. 2020

의로운 다말?

하나님께서는 마태를 통하여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그 가운데 5명의 여자를 등장시켰다. 그들은 모두 보수적인 윤리관을 가진 남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여자들이다. 일단 마리아를 제외한 4명의 여자는 모두 이방 여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인들이었다. 라합은 여리고의 창기였고, 밧세바는 남자를 유혹했다는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쓴 여인이었고, 룻은 타작마당에서 자는 보아스 곁에 조용히 다가가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던 여인이었다. 이들 중 가장 변호하기 힘든 여인이 다말이다. 그녀는 창기 흉내를 내면서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아들을 낳은 여인이다. 이런 여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다말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한 이후 주변 사람들은 나를 말렸다. 괜히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고마운 충고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려간 사건(37장)과 요셉이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된 사건(39장) 사이에 생뚱맞게 다말 사건을(38장)을 기록하였다. 그것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솔직히 이 본문은 목사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본문 중 하나이다. 주석가들도 해석하기 힘들어하는 부분 중 하나이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요셉 이야기 가운데 다말의 불미스러운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였을까? 목사들을 골탕 먹이기 위함일까? 나도 다른 목사들처럼 이 부분을 그냥 지나쳐버릴까? 한참 고민하였다. 그러다 본문을 읽으면서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나보다 더 의로웠으니(She hath been more righteous than I)”(창 38:26, KJV).


성경은 “의로운(righteous)”이라는 말을 경솔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의(righteousness)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정하실 때 사용하신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


예레미야는 탄식하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렘 17:9)고 하였다. 죄악 된 세상에서 죄를 생각하고 죄를 범하는 인간에게 소망은 없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있겠는가?


하박국 선지자는 의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연결하였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의로워질 수 없다.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아서 의로운 것이 아니다. 루터가 고백한대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합 2:4) 산다.


유다는 다말을 왜 의롭다고 평가하였을까? 그리고 성경은 왜 그 사실을 기록하였을까? 성경이 다말에게 내린 평가와 전통적으로 성경을 해석해 온 (남성) 주석 학자들의 견해는 완전히 다르다. 지금까지 다말은 더러운 방법을 사용하여 시아버지를 속이고 부정한 관계를 가진 음란한 여자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다말은 의로운 여인이었다.


정말 성경은 다말을 의로운 여인으로 평가할까? 창세기 이후 다말이 등장하는 곳은 룻기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베들레헴 장로들은 두 사람의 결합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한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그대(보아스)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룻)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에브랏 가문에서 그대가 번성하고, 또한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떨치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그 젊은 부인(룻)을 통하여 그대(보아스)에게 자손을 주셔서, 그대의 집안이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게 하시기를 빕니다”(룻기 4:11-12, 새번역).


베들레헴의 장로들이 보아스와 룻의 결합을 축복하는 말로 다말을 언급한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오늘날 우리의 윤리적 잣대로 생각하면, 이건 축복이 아니라 모욕이요 조롱이다. 그러나 보아스와 룻의 결혼 축하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예외없이 그것을 모욕이 아니라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보아스와 룻도 매우 기뻐하였다. 성경은 다말을 음란한 여자라거나 더러운 여자로 평가하지 않고, 복된 여자, 의로운 여자로 평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말의 이름이 또 등장하는 곳은 다윗이 첫 번째 딸을 낳았을 때 ‘다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다말이 수치스러운 이름이라면 다윗은 결코 그의 딸 이름으로 ‘다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다말’이라고 이름 짓는 일을 명예롭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음이 틀림없다(삼하13:1).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곳은 예수님의 족보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예수님을 욕보이기 위하여 '다말'을 등장시켰을까? 절대로 그럴리는 없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 여인들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냥 인간의 윤리적 잣대로 함부로 평가해선 안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깊은 생각없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의 윤리관으로 다말을 평가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경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지적하였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다말은 분명히 재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말을 어떻게 재해석해야 할까? (다음 편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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