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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의 왕

로이드존스 설교 새롭게 읽기

by Logos Brunch

모차르트가 작곡한 노래 중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Dona nobis pacem)이란 곡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qxNDFh8wR4&t=34s

세상은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세상은 언제나 갈등과 싸움과 전쟁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크게 보면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싸우고

작게 보면 가족 안에서 싸움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윌리암 듀란트는 역사가 기록된 이래 약 4,0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300년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리더들은 언제나 적을 만들어 놓고 싸움을 조장했습니다.

그래야 자기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입니다.

미움이 커지면 증오가 되고 증오가 커지면 살인이 됩니다.

그리고 살인이 커지면 대량 살상을 자행하는 전쟁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아예 처음부터 그 싹을 잘라버리려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곧 살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형제를 향해서 “바보”, “멍청이”라고 해도 살인죄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큰 죄와 작은 죄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짓지 않는 죄입니다.

작은 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짓는 죄입니다.


흔히들 내로남불이라고 하지요.

로마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은 싸움하고 싶은데 칼과 창으론 안되니까 혈통과 민족성으로 싸움했습니다.

그게 바로 할례와 율법이었지요.

아마도 힘이 있고 총과 칼이 있었으면 그렇게 말로만 싸우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 불쏘시개가 될 것이라고 저주했습니다.

그건 말로만의 저주가 아니라 결국은 살인을 넘어선 전쟁으로 갈 것입니다.

전쟁은 꼭 정치적 견해 차이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장 무서운 전쟁은 종교 전쟁입니다.

멀리 중세 십자군 전쟁을 이야기하거나 마녀 사냥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이 시대도 종교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 간 전쟁이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쟁이 있습니다.

개신교와 개신교의 전쟁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종교적 견해와 다른 사람은 다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살인죄와 같습니다.


세상이 평화를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전쟁입니다.

평화를 위한 전쟁,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힘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고, 말도 못 하게 하고, 쫓아내 버리고, 죽여버립니다.

획일화입니다. 전체주의입니다.

이건 총과 칼로 만든 평화입니다.

오늘날 정치 사회를 가만 살펴보면 마치 이런 평화를 원하는 듯합니다.

이건 평화가 아니라 억압이요, 폭정입니다.

이집트의 바로를 비롯하여 독일의 히틀러, 일본의 식민지 정치입니다.

이건 최악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두 번째 방법은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대화하자는 것입니다.

이게 소위 민주주의의 기본 사상인 대화, 협상, 타협, 조정, 조화입니다.

이론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너무나 고집이 세고 편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성이 이런 멋진 평화를 이루어내기엔 너무나 한계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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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평화는 무엇입니까?

그건 사랑과 동정과 이해와 희생입니다.

남을 희생하기보다 자기가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원수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을 돌려대는 사랑입니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한 사람이 술에 취해 고성을 지르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경창이 와서 체포한다고 협박도 하고 힘으로 억누르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술 취한 사람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경찰과 술 취한 사람이 충돌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술 취한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굉장히 건장한 청년이고 운동을 한듯한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술 취한 사람에게 다가가 끌어안았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품에 안아주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은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요 위로요 이해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품어 안아주심을 넘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온 생명을 다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 앞에서 깨달은 것은 자신이 술 취하여 이성을 잃어버리고 행패를 부렸던 죄인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전에 자기가 이분법적으로 타인은 나쁘고 잘못되었지만, 나는 착하고 성실하고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인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자기를 포함한 모두가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까지 사랑을 쏟아부어 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누구든 진정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면 나와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다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초대 교회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할례를 받았거나 못 받았거나, 지식이 있거나 무식하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보수이거나 진보이거나 모두가 다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평화의 정신으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 품어주고 사랑해주려고 했습니다.

이슬람도 사랑하고, 세상의 흉악한 죄인도 사랑하고, 자기에게 칼을 찌르는 사람을 사랑하여 품어주려고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가장 훌륭한 신앙은 원수를 사랑하다 원수의 손에 죽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순교는 바로 그들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그런 정신을 회복할 때 진정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바로 그런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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