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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04. 2020

하나님은 시골을, 사단은 도시를 만들었을까?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삶 보다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길들여져 왔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도시 사회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삶을 왜곡하며 오히려 더 비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진정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찾으려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https://youtu.be/mCCPeu3f8Wk

룻소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신학계에서도 하나님은 시골을 만드시고 사단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사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은 광야 생활하던 때이고,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도시보다는 유목생활을 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근거로 광야생활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신혼 생활로 묘사한 예레미야와 도시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 호세아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은 도시보다 시골을 더 선호하시고, 룻소처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시골로 가라고 하실까요?


이걸 밝히기 위해선 아브라함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도시는 갈대아 우르입니다. 수메르의 설형문자인 우르(uru)는 아카드어로는 아루(alu) 이고 히타이트 - 하피라스(Happiras), 고대 히브리어 - 이르(ir)이고 그리스어로는 폴리스(polis)도시입니다. 


우르라고 하는 도시는 후일 바벨론과 로마로 대표되는 도시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고대 도시는 권력과 종교가 밀접하게 연결된 곳입니다. 도시의 중앙에는 신을 섬기는 성전이 있습니다. 바벨탑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도시는 한 사회가 이룩한 성공의 상징입니다. 도시는 세상도 하나님처럼 질서, 문명,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안전과 평화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세상 도시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그리고 오늘날 현대 도시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입니다. 힘 있고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만 대우받는 사회입니다. 그 도시는 교만과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하비 칸은 이렇게 말합니다. 

“독재적인 지역 신을 가진 고대 도시 국가들에서, 통치자나 왕이 신들의 뜻을 해석했다. 그리고 백성은 신들과 또 그들을 지상에서 대표하는 통치자들의 노예로 살았다. 사회 정치적 세계를 형성했던 종교적 신화를 통치자에 대한 저항을 신들에 대항하는 반역을 꾀하는 것으로 간주해 버렸다. 실제로 이러한 신화에 발맞추어 통치자는 종종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polis) 도시에서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비전은 무엇일까요? 도시를 거부하고 시골에서 은둔자적하며 수도생활이나 하거라!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더 나은 약속을 위하여 세속 도시를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he was looking forward to the city with foundations, whose architect and builder is God.) 

영어 성경은 우리말 성경보다 히브리어의 의미를 더 잘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도시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도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세우시고 다스릴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시를 만들어보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간하배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이 도시들과 그것들을 보장한 하나님의 구속이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여섯 개의 도피성이다(민 35:9-34, 수 20:1-9) 도피성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 자기 보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세속의 도시와 달리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도시는 긍휼과 정의와 의가 세워지는 도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우는 도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를 나타내는 전시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사명은 세속 도시에 들어가서 그 도시를 하나님의 도시로 바꾸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도시 선교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도시를 무력으로 싸워 이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속 도시의 대안으로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 세상의 방법, 세상의 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우는 도시이다. 이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도시는 재산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인종이나 문화로 나누어진 사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도시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이 언제라도 들어와서 함께 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연 도시입니다.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도 똑같이 대우받는 도시이다. 이 도시는 환대와 돌봄과 보호와 사랑이 충만한 도시입니다. 


간하배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웃 사랑은 재산이나 계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야 했다. 이스라엘이 들어간 약속된 땅의 도시 세계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누어진 세계,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로 나누어진 계급 사회, 내부자와 외부자 /이방인으로 인종이 나누어진 사회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언약을 따라 사는 이스라엘은 그와 같은 구분 없이 정의와 동정을 나타내야 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도시의 완결판은 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오늘날 세속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세속 도시와 세상의 방법으로 논쟁하고 싸우려 해서는 안됩니다. 힘으로 정복하려 하고, 반대파를 다 숙청하고 없애려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후욕 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건 평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만드는 세상의 방식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환대하고, 다름을 사랑하고, 다름을 포용함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으로 녹여내야 합니다. 가르치고 훈계하고 징계하고 비판하고 정죄함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방법은 안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하나님도 할 수 없는 방법을 오늘날 보수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끊임없이 세상과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고 하나님의 선교를 가로막는 짓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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