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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06. 2020

룻과 보아스의 결혼 뒷 이야기

성경을 새롭게 읽기

현대 윤리로 생각하면 보아스는 룻과 처음 결혼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대 중동 사회의 문화 풍습을 알면 생각을 고쳐야 한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었다.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목축업과 농업을 병행했는데 목축업을 하던 목자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다윗은 양을 칠 때 사자와 곰을 만나 그들의 위협 앞에서 양을 지켰다고 하였다. 사자와 곰을 만난 사람은 다윗만이 아니다.

https://youtu.be/CSeHqEYlQZE

마치 어촌에 과부들이 많은 것처럼 유목 사회 역시 과부가 많았다. 어떤 상황이든 남편이나 자식을 잃어버린 과부는 그 사회의 최고 약자로 전락하였다. 구약 성경 곳곳에 과부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기록되어 있다. 고대 사회에서 이런 여자들의 고통을 헤아려서 여러 가지 사회제도를 두었는데, 계대 결혼, 고엘 제도, 희년 제도 등이 있다.


계대 결혼은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게 해주는 제도이다. 물론 동생은 따로 자기 부인을 둘 수 있다. 고엘 제도는 친족이 가난하여 땅을 팔 경우 그것을 사서 다시 친족에게 돌려주는 제도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자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 일정량 의무를 져야 했다.


성경에 제도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사회 관습적으로 일부다처제도 비슷한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여러 명의 여성과 결혼함으로 여자 집안의 경제를 모두 책임지는 형태이다. 물론 가난한 남자는 한 여자밖에 책임질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은 모두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였다.


세 번째로 고엘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없을 때 희년 때까지 기다려서 자기 땅을 돌려받는 경우가 있다. 성경을 살펴보면 희년 법이 존재하긴 했지만, 실제로 희년을 실시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아무튼 당시 사회 경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양한 관습법들이 존재하였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할 때 미혼 청년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룻을 부를 때 “내 딸아”(3:10)라고 부른다. 그리고 룻에게 “네가 빈부를 물론 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3:10) 했으니 보아스는 분명히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보아스 같은 나이 많은 부자가 그동안 결혼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또 생긴다. 그것은 보아스에게 자녀가 없었을까? 만일 보아스 같은 부자가 자녀가 없었다면, 얼마든지 또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을 것이다. 일단 보아스에게 자녀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룻의 역할을 무엇이었을까? 일부 성경학자들은 룻이 유대 민족의 대통을 이어주는 구속사적 역할을 감당한 여인으로 해석한다. 그리 해석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한다. 왜냐하면 룻기의 마지막 부분에 보아스의 족보가 등장하는데 거기 다윗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룻이 만일 계대 결혼을 한 것이라면, 당연히 룻의 자녀는 말론의 족보에 들어가야 한다. 만일 룻이 계대 결혼한 것이 아니라면, 보아스의 자녀 중 다른 자녀를 통해서도 유다 족보는 이어져 갈 수 있다. 굳이 모압 여인 룻을 통해서 유다 족보를 이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룻의 역할은 유다 지파의 족보를 이어주는 놀라운 역할을 감당한 훌륭한 여인으로 해석하는 데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 공동체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도록 규정된(신 23:3) 모압 여인 룻을 유다 지파로 받아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모압 여인을 다윗의 족보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오도록 하신 것이다. 그것은 굉장한 선교적 의미가 있다. 유다 민족이 주장하는 민족적 정통성, 신앙의 보수성을 한꺼번에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룻기 3:10에서 언급한 인애(헤세드)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맥을 보면 젊은 사람을 택할 수 있었는데 늙은 보아스를 선택한 것에 대하여 보아스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대로 진짜 인애는 누가 누구에게 베푼 것일까? 요즘 시각으로 보면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노인과 결혼하면 당연히 젊은 여자가 인애를 베푼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유대 사회,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이것은 거꾸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을 주울 때부터 누가 인애를 베풀었는가? 보아스가 룻에게 베풀었다. 일부러 곡식을 떨어뜨려 주고, 종들의 손에서 룻을 보호하고, 함께 식사하도록 초청하였다. 보아스의 이러한 호의를 알고 나오미와 룻은 보아스에게 인애를 요청한다. 기업 무를 자로서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사실 기업 무를 첫 번째 권한은 보아스에게 있지 않다. 이러한 요구는 보아스의 입장에서 볼 때, 절차에도 맞지 않으며 황당하기 이를 때 없다. 게다가 고엘의 의미를 확장하여 계대 결혼까지 요구하였다. 레위기 법은 고엘에게 계대 결혼의 의무를 지우지 않았다. 모압 여인 룻이 고엘 제도를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보아스도 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첫 번째 고엘인 ‘아무개’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보아 그 시대에서는 고엘 제도에 계대 결혼의 의미까지 포함한 듯하다. 이는 당연히 보아스의 헤세드(인애)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아스는 자신의 헤세드를 조금도 내세우지 않고 “너의 헤세드”가 크다고 오히려 룻을 칭찬하였다. 그 헤세드는 자신에게 베푼 헤세드라기보다는 나오미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태도를 칭찬하였다. 룻기의 헤세드 개념은 남의 위하여 자신의 희생하는 것이다(룻1:18,2:20,3:10). 여기서 보아스의 모습은 진정 우리의 구속자이시고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헤세드, 하나님의 헤세드를 보게 한다.


계시록 4장에 보면 하나님께 받은 면류관을 벗어서 주 앞에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헤세드이다. 보아스는 자신이 헤세드를 실천하면서 오히려 룻이 헤세드를 보여주었다고 칭찬한다. 보아스는 진정한 헤세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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