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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08. 2020

불통 기독교, 소통 기독교

UCLA 옥성득 교수는 “신학 학술서가 없어서 한국 교회가 망하고 있다”는 유튜브 동영상에서 ‘한국인의 고민을 다룬 책이 없어서 한국 교회가 망한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외국의 기독교 번역서에 의존하여 신앙생활하는 듯합니다. 외국의 유명 작가들의 번역서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훌륭한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보통 10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책 한 권을 출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문 학술서 2권만 내도 서양에서는 대가로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책이 훌륭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요.

https://youtu.be/UOr9mvbjQ5U

문제는 그들이 한국의 문제, 한국의 상황을 고민하여 쓴 책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과 문화 속에서 주어진 문제를 고민하여 썼다는 사실입니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고민한 것과 오늘 한국의 고민이 맞아떨어지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의 고민, 한국 교회의 고민, 한국 그리스도인의 고민이 없는 책을 읽으니 마치 공중 부양한 것처럼 서양 신학 속에 붕 떠 있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번역은 아무리 잘해도 반역이란 말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번역이 쉬운 듯합니다. 다른 언어에서 동의어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동의어는 거의 없습니다. 영어에 Life는 한국어에 동의어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한국어에선 생명으로도 번역되고 생활로도 번역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영어의 Life를 50%밖에 반영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같은 한국어라고 해도 조선 시대로 가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같은 한국어인데 번역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번역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모든 세대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세대 모든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언어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면 복음도 그 바뀐 상황에 적응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바꾸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로 바꾸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대 사람, 그 상황의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깊이 있게 성찰하고 복음으로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답해주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고민하는 종교입니다. 그 시대의 아픔을 가지고, 그 문화와 상황의 고통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유일한 답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소통하는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들리지 않는다면 복음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한국의 현실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 있나요? 아니면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의 언어를 그대로 되풀이만 하고 있나요? 옥성득 교수는 기독교의 미래를 통계적으로 분석하였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현재(2019년) 미국 기독교가 전체 63%인데 그중 개신교가 43%, 가톨릭이 20%입니다. 제가 의미 있게 본 도표는 미국의 세대별(generation) 기독교 분포입니다. 1981년에서 1996년 출생한 젊은이들은 한 달에 한 번 교회 가는 경우가 35% 정도입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의 통계니까 한국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의미를 찾을 순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청년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렇습니다. 청년의 고민을 청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청년의 언어로 풀어주는 복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소통하는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불통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 한 세대만 건너가면 기독교는 완전히 우물 속으로 빠져 자기만의 목소리를 메아리처럼 듣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기독교가 부흥할 때는 언제나 그 세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 세대와 소통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종교개혁시대를 돌이켜 봐도 그 시대의 가장 실질적인 고민을 종교개혁자들이 풀어주었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점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고민하고 풀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와 유럽을 두루 다니며 전했던 복음, 어거스틴이 깨달았던 복음, 종교개혁자들이 깨달았던 복음은 그 시대를 적실하게 두드렸기 때문에 복음이 복음 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만 사로잡히면 복음을 죽이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바울도, 어거스틴도, 칼빈도, 로이드 존스도, 팀 켈러도 복음을 시대에 맞게 풀어야 한다는 데 모두 뜻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한국 기독교가 여기에 뜻을 같이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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