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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09. 2020

우물 안 개구리, 꽉 막힌 교회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희고 흰 깃에 검은 때 묻힐세라. 

진실로 검은 때 묻히면 씻을 길이 없으리라. 


조선 중기 광해군 시절 선우당(善迂堂)이시(李蒔)는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려는 동생을 말리며 지은 시조이다. 선우당 이시는 임진왜란 탓도 있지만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인 안동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당시는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가 권력을 농단하던 시기이고 인목대비 폐모론이 대두되던 어지러운 시기였다.  이시는 동생 4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에 영광이긴 하지만, 정권 싸움에 휘말려 장차 가문에 화가 닥칠 것을 염려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7UOVTAz-T0Q

이시의 뜻이 어떠하든 그의 시는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었다. 자신의 의로움과 고고함과 순결함을 지키기 위하여 세속의 더러움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어찌 보면 그들이야 말로 훌륭한 사람이고 경건한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속세를 떠나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경건 생활을 정진하는 사람을 모두 존경하기 마련이다. 


예수님 당시 에센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통탄해 마지않았다. 자격 없는 제사장들이 로마의 권력과 손을 잡고 온갖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이 드리는 제사와 예배는 사람이 보기에도 합당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헬라 문화에 깊이 물들었고, 교권주의와 물질주의뿐만 아니라 황제의 신상까지 있어서 그야말로 우상의 도시였다. 에센파들은 우상의 도시에 결코 발을 들여놓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다. 그건 예루살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당시 헬라 도시는 모두 우상의 소굴이었다. 시장에서 사 먹는 음식 대부분은 우상 제물이었다. 경건한 신앙인은 그러한 죄악의 도성 가까이하는 것은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백로는 까마귀 노는 곳에 갔다가 괜히 희고 흰 깃만 더럽힐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였다. 그는 우상의 도시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도시로 들어갔고, 그 도시들을 선교 거점으로 삼았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모두 그 당시 지역 수도였다. 그는 희고 흰 깃을 더럽힐까 봐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도시들을 거룩한 도시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물론 로마의 도시들에 비해 그리스도인 공동체 즉 교회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바울은 기죽지 않았다. 세상이 더럽다고,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하다고, 그들을 멀리하고 나만 홀로 고고한 척하지 않았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움직이는 공동체다. 죄악 된 세상이 두려워 자기만의 커다란 성을 쌓고 숨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이 언제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멀리하였던가?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기꺼이 우상의 도시에 들어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고 예수의 정신을 그곳에서 보여주었다. 


구별(거룩)은 저들과 내가 다르다는 표시라고 하지만, 그것은 까마귀와 백로의 구별이 아니다. 멀리하고, 손가락질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므로 자신의 의로움을 상대적으로 표현하는 구별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속에 들어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룩이다. 바울은 상업의 중심지요, 헬라 로마 문화의 중심지요, 우상의 소굴인 도시들을 불신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말과 행동으로, 삶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을 나타냈다. 


세상과 싸우려 하지 않았고, 힘을 규합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칼을 무기로 주지 않았다. 세상을 향하여 정의를 강요하지 말고, 그리스도인 공동체 스스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모습을 보여서 대안 공동체가 되라고 요구하셨다. 세상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면서 정죄하지 말고, 스스로 세상 문제를 끌어안고 울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라고 하셨다. 비록 교회는 왜소하지만, 때리면 맞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지만, 신앙 공동체의 강한 힘은 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다. 교회는 선교적 자석이 되어야 한다. 끌려오도록 모범을 보이고, 사랑을 실천해야지, 정죄함으로 세상을 멀리 더 멀리 떨어지게 하는 곳이 되어선 안된다. 


복음을 실천할 자신이 없는 교회, 그래서 방어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교회는 힘이 없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다. 죄악 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이 곳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때 교회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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