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개장 시간이 되면 모든 종업원이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그들의 웰컴 인사는 이해가 된다.
‘우리 물건 많이 사주세요’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호텔에 가도 입구에서부터 따뜻한 환대를 경험한다.
현대의 환대는 모두 상술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핵심 표지이다.
아브라함은 세 명의 낯선 남자를 맞이하여 물과 떡과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를 대접했다.
낯선 남자 세 명이 나에게 다가온다면 난 어떻게 할까?
아마도 몸을 움츠리고 잔뜩 경계의 눈빛을 보내지 않을까?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까?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경계와 적대감을 떨쳐 버리고 그 낯선 손님을 환대하였다.
적대를 환대로 바꾼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기쁜 소식을 들었다.
사렙다 과부는 마지막 남은 음식을 끝으로 죽음을 선택하려고 하였다.
가난의 끝이, 가난의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사렙다 과부만큼 느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마지막 호의를 베푸는 법이다.
지금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손잡아 줄 사람이 필요하였다.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필요하였다.
그런 그녀에게 엘리야는 마지막 음식을 요구하였다.
그녀의 가슴이 서늘해지지 않았을까?
세상 참으로 비정하구나!
그녀의 마음은 시베리아 겨울 기후처럼 차가워졌지만, 그녀는 마지막 죽을힘을 다해 엘리야를 환대하였다.
차가운 마음을 환대로 바꾼 순간 그녀는 하나님을 만나고 기적을 경험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실망과 좌절과 자포자기와 절망을 경험하였다.
두 어깨는 축 처졌고, 희망과 기쁨은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
보통 절망한 사람은 어떤 상태가 될까?
우울증, 대인 공포, 꽉 닫힌 마음, 만사가 귀찮음.
그런 그들이 동행하던 낯선 남자에게 하룻밤 같이 묵자고 청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절망 속에서도 환대를 베풀었다.
그 환대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주님은 넉넉한 물질과 여유로운 시간에 찾아오시지 않는다.
주님은 적대를 환대로 바꿀 때 찾아오신다.
차가운 마음이지만, 절망 속에 빠져 있지만, 그 모든 환경을 이기고 환대할 때 찾아오신다.
환대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표지다.
레스토랑이나 백화점처럼 커다란 플래카드에 “환영합니다”를 써 붙인다고 환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교회는 참된 환대는 잊어버리고 가식적 환대, 계산적 환대, 세속적 환대에 빠진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