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십시요!
학교에서 늘 듣던 이야기다.
그러나 학교는 세상에서 가장 뒤처진 곳 중의 하나이다.
일제 침략기 시대와 현재 교육은 거의 차이가 없다.
선생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은 마음 놓고 선생에게 질문할 수 없다.
질문하면 학생과 선생이 모두 당황한다.
진도를 나가야 하는 데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친구들이 눈총을 주고
선생은 대답할 실력이 없어 우물쭈물한다.
그러니 알아서 질문하지 말아야 한다.
실수해도 포용력 있게 받아주지 않고,
두려움 없이 질문하며 덤벼들도록 놓아주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이끌어주지 못하니 죽은 교육이다.
교육에 빗대 말했지만, 교육보다 더한 것이 오늘날 교회다.
19세기 방식, 아니 500년 전 종교개혁 당시 교회가 가장 완전하다고 자랑하며 자부심을 가지는 곳이 교회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하나님 백성
두려움 없이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나가는 개척 정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창의력 있게 도전하는 모습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나는 성경을 비틀어도 보고, 거꾸로도 보고, 다른 곳에 강조점을 두어 해석도 해본다.
물론 잘못 보는 경우도 제법 있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 하나님은 한 면만 보고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크고 크신 분이시다.
‘내가 본 하나님이야말로 정답이다’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오답이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네가 본 것은 잘못이다. 내가 본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해석이 바르지 못하다.
그런 식은 곤란하다.
답은 이미 500년 전에 내려놓았으니 딴짓하지 마라.
웃기지 마라!
하나님은 500년 전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다.
난 오늘도 성경 속 여인 이야기를 가지고 고민한다.
오늘 읽은 말씀은 열왕기상 1장 1절에서 4절이다.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저자는 왜 열왕기상 첫머리에 아리따운 수넴 여자 아비삭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성경에서 “이름”을 거론하면 그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인데 정말 아비삭이 중요 인물인가?
그저 나이 든 다윗의 잠자리를 따뜻하게 한 여인의 이름을 굳이 밝히고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밝힌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열왕기상의 전체 그림을 그리는 첫 이야기로 등장해야 하는가?
다윗의 말년과 나이 어린 처녀 아비삭의 관계는 무엇일까?
열왕기서가 선지자적 관점에서 쓰였다고 하는데 이 본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오늘 아침 내 머리는 복잡하다.
주석을 찾아보고, 참고 문헌을 찾아봐도 아무도 이 문제에 답을 하지 않고 있다.
정답이 어디 있는가?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은 이 문제를 고민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성경 속 여인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쓰는 이유가 있다.
시비 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다.
참고문헌을 달면 그것 가지고도 문제 삼는다.
과거의 전통이라는 틀에 가두어 두고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 종교다.
하나님이 그리도 속이 좁았던가?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폭이 얼마나 큰지 다 측량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교회 신학자들 지도자들은 언제나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한다.
난 따르기 싫다.
난 하나님의 넓은 품에서 헤엄치고 싶다.
그래서 다윗의 말년과 아비삭 이야기에 숨겨진 풍성한 의미를 찾으러 도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