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의심은 긍정적 의심일까요? 부정적 의심일까요?
과학자들이 공부하는 방법,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현대 학문이 공부하는 방법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걸 회의라고 하지요.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다고 전제하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세례요한이 그런 식의 의심이었을까요?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성경을 알고 싶어요. 이게 궁금해요. 하는 의심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세요. 저에게 가르쳐 주세요.
저는 그런 단순한 의심, 긍정적 의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의심은 불신하는 의심이었을까요?
전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의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굳이 이름 붙인다면 절대적인 의심, 궁극적 의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만날 때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넘을 수 없는 강이다.
이것은 말로만 믿습니다 하면서 건너는 강도 아니다.
이것은 철저한 의심과 반성과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왜냐하면 나의 삶 전부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심에서 믿음으로 건너뛰려면 궁극적 용기가 필요하다. - 폴 틸리히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전생애를 맡겼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선언할 때는 자기의 선언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판가름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명예와 삶과 인생 전부를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전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토대가 다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는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믿음을 반성하였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인생을 걸었는데 이게 맞는 것인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고 나의 삶 전부를 투자하고, 죽어도 좋은가?
오늘날 교인들은 믿음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루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다고 말했을 때의 진정한 의미를 오늘날 너무 값싸게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갈등도 없고, 고민도 없고, 의심도 없이 아주 쉽고도 단순하게 “아멘”을 남발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을 혜택이 너무나 큰 반면 내가 바쳐야 할 희생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수백번 수천번 외치고 있다.
세례요한이 의심하던 그 상황과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들은 로마의 사회 체제에서 완전한 아웃사이더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사회에서 격리된 자로, 소외된 자로, 핍박받는 자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로마 황제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선택하는 것의 의미를 현대인들은 전혀 모르는 눈치이다.
그들이 선택한 하나님 나라는 백퍼센트 세상 나라와 다른 나라다.
그들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걸 선택한 용기는 뚜렷한 이유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값싸고 쉬운 믿음의 결정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반성하며 갈등하고 회의하고 의심하고 불신하고 그런 걸 반복하다 용기있는 선택, 생명을 건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자기 삶의 밑바탕이 흔들리는 가운데 의심하고 있다.
이건 어떤 면에서 절대적 의심이다.
무한한 존재,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심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설득되는 차원을 뛰어넘어야 하는 커다란 시험이다.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선언할 때 자기 전 인생을 걸었던 것처럼 이제 다시 또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사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별 다른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세례 요한은 어쩌면 더 막막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택과 결단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믿음은 용기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들은 세례요한과 비슷한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의 전 인생과 생명과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거는 용기를 보였다.
그리고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한번 믿음의 반석 위에 섰다고 해서 의심과 불신과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수시로 우리를 방문한다.
그래서 한번 믿음의 반석 위에 서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믿음의 반석 위에 섰는지, 그리고 그 위에서 어떤 마음으로 믿음을 선언했는지 전혀 살펴보지 않고 그저 마지막 결론의 말, “믿음 위에 굳건히 서라”는 말을 너무 값싸게 받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자신은 아무런 결단도 없고, 자신의 자신의 인생과 삶과 생명을 걸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삶을 전부 투자할 결심도 없이 “아멘” “할렐루야”를 남발하는 경우이다.
본회퍼는 이걸 값싼 은혜라고 하였다.
오늘날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순교와 핍박의 위기에서도 믿음위에 굳건히 서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죽겠습니다 하였던 것을 잊어버리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사실을 지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범한다.
이 믿음은 결코 지식의 믿음이 아니다.
성경 지식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으로 믿음이라 하지 않는다.
자기 확신을 믿음이라 하지 않는다.
이 믿음, 자기 인생 전부를 거는 용기있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손을 잡아야 건너갈 수 있는 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