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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01. 2020

용서하는 공동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생명까지 다 바치신 분인데, 교회 안에는 죄인을 찾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용서와 이해와 사랑을 베풀고 싶은데 교회 안에서 용서와 사랑을 찾기가 힘듭니다.


혹여 교회 안에 죄인이 있다든가, 상처받은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정체를 잘 숨겨야 합니다.

경건한 척하며 의로운 척하는 사람들 앞에서 경솔하게 자신의 허물을 이야기했다가 생매장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 때는 아무도 없는 골방을 찾아야 합니다.

홀로 운전할 때 소리치고, 눈물 흘릴 수는 있으나 공동체에서는 참아야 합니다.

청년부 사역을 할 때 일입니다.

시골에서 서울에 정착하여 청년부에 들어온 한 여 청년이 있었습니다.

키가 작고 조용한 그녀는 순수하였습니다.

서울 생활이 힘들고 어려울 때 시골에서 하던 데로 청년들을 붙잡고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예의로 받아주던 청년들이 점차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 살기도 바쁘고 힘들어 죽겠는데 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잘 사는 척, 행복한 척하는 위선에 익숙했던 터라 솔직하게 다가오는 그녀가 부담스러웠습니다.

청년들은 뒤돌아서 그녀에 대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털어놓았던 아픔은 고스란히 말거리가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왕따가 되었습니다.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그녀는 청년부를 떠났습니다.


청년부는 다시 행복해졌습니다.

모일 때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세요?’ 인사하면 ‘잘 지내고 있어요.’ 서로 행복한 얼굴로 대답하였습니다.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가득하였지만, 돌아서면 허무한 공동체였습니다.

그게 바로 현실의 교회 공동체 모습입니다.


기도 제목을 나누는 시간이 되면, 제일 힘들어합니다.

머리를 잘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난한 것은 교회 부흥을 위하여, 남북통일을 위하여, 목회자를 위하여, 청년부 단합을 위하여 등등입니다.

아무튼 자기 속사정이 드러나지 않은 기도 제목이어야 합니다.

언제 구설에 오를지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예수님은 우리 사이의 죄를 처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죄를 용서하므로 깨끗이 청소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을 하기 싫어합니다.

여기저기 검은 비닐봉지에 꽁꽁 싸매어 둔 죄를 뒷주머니에 달고 다니면서 냄새를 풍기는 데 우리는 모른 척 외면합니다.


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진정한 사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죄라면, 하나님께 처리를 부탁해야 합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무릎으로 회개하며 눈물로 자백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한량없이 베푸는 분이십니다.

니느웨의 죄악을 용서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요나는 탄식하였습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욘4:2 새번역)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불공평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하고 경건한 존재라기보다 세속적인 존재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저지른 죄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죄를 처리할 권세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듯합니다.

다 고백하면 용서해주겠다는 말만 믿고 고백했다가 봉변을 당하는 사람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를 모릅니다.


죄와 허물과 아픔과 눈물을 함께 나누지 못하면 진정한 교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냄새나는 비닐봉지를 이제 풀어야 할 때입니다.

혼자 외롭게 떠는 공간에서 풀 것이 아닙니다.

함께 마음을 나누어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친구와 함께 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나눌 그런 친구와 풀어야 합니다.

혹시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 친구가 되어 주십시요.

분명 누군가 여러분 주변에 냄새나는 검은 봉지 안에 문제를 가득 담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 사람 모두는 죄인입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아닌 척하지만 속지 마십시요.

모두 고민이 있고 아픔이 있고 죄가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다면 여러분도 예수님 같은 친구를 만날 것입니다.


본회퍼는 말했습니다.

“경건한 사귐은 아무도 죄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용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공동체가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https://youtu.be/0tBkI0y5O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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