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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1. 2020

펜데믹에서 염려 근심 처리법

요즘 펜데믹으로 많은 사람이 우울합니다.

장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우리 마음을 어둡게 만듭니다.

사람 만나기가 무섭고, 병에 걸릴까 봐 무서운 세상입니다.

혹시나 나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염려하여 조심 더 조심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희망적인 소식보다 절망적인 소식, 기쁜 소식보다 슬픈 소식이 더 많이 들려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초대교회 교인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이고 싶어도 모일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핍박 가운데 있었고, 실제로 많은 성도가 잡혀서 옥에 갇히거나 죽었습니다.

자기 정체를 숨길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어서 그들은 물고기 암호를 그리며 다녔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어서 오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마라나타” 인사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불안한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복음이 가장 힘있게 전파되었습니다.

왜요.

그들이 입을 크게 열어 “예수 믿으세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쳐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때는 전도하다 걸리면 돌에 맞거나 옥에 갇히거나 처형당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전도했을까요?

그들은 입으로 전도하지 않고 얼굴로 전도했습니다.

얼굴로 어떻게 전도했을까요?


세상은 말로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불신자와 신자가 대화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영이 통하지 않습니다.

딱 한 가지 통하는 게 있습니다. 얼굴입니다.

고통스러운 얼굴, 기쁜 얼굴, 불평하는 얼굴, 감사하는 얼굴

초대 교회 교인들은 누가 봐도 암담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죽인다는 소식이 들리면 많은 사람이 구경하러 왔습니다.

사자와 곰에게 죽는 장면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누가 봐도 끔찍한 광경입니다.

죽음이 예상되는데 그리스도인은 그 앞에서 어떤 얼굴을 했을까요?

공포와 두려움에서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건 충격이었습니다.

울어야 마땅한 자리에서 찬송하고, 괴로워해야 할 자리에서 감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기쁨, 감사, 찬송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도 상황과 환경 때문에 근심하여 얼굴을 찌푸릴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그러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시편 저자가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모르지만, 그는 낙심하였고 불안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때때로 낙심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낙심하는 요인을 살펴볼까요?

1. 육신의 문제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오버 액션을 합니다.

아합왕이 마차를 타고 사마리아로 돌아가는 데 엘리야가 신이 나서 그 앞에서 달려갑니다.

마차와 사람이 달리면 누가 빨리 달릴까요?

당연히 마차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립니다.

어떻게 될까요? 당연한 결과이지만 탈진, 피곤이 옵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말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에 도착하려는 데 이세벨 여왕이 엘리야를 잡아 죽이라는 명령에 놀라 다시 또 뜁니다. 그가 남쪽 광야로 도망치다 힘이 다 빠져 쓰러집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차라리 날 죽여주세요.

엘리야는 왜 낙심하고 절망했을까요?

그건 피곤과 탈진과 과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지나친 업무로 과로하거나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받거나, 환경에 억눌릴 때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처방전은 육신의 회복을 위해 쉬라고 하였습니다.


2. 사단입니다.

사단 마귀는 5,000년이 넘는 경험이 있습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침체케 하는 전문가입니다.

사단이 그리스도인을 쓰러트리는 갖가지 방법을 C.S.루이스는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 읽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사단이 사용하는 법을 다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서 기회가 되면 하나씩 이야기하도록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3. 불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낙심하는 가장 큰 원인은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신 마귀의 말,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쓰러집니다.

첫 사람 아담이 뱀의 말을 듣다가 타락했습니다.

제 아무리 영적으로 강하다 자부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쓰러집니다.

지금 펜데믹으로 예배를 정상적으로 드릴 수 없기에 더욱 온라인으로라도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사단이 우리 귀에 그들의 생각과 사상을 전염시키기 가장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처방전

오늘 시편 저자는 낙심하고 절망하고 불안할 때 확실한 처방전을 내립니다.

그건 사단을 보지 않고, 상황을 보지 않고,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왜 낙심하고, 왜 불안해하고, 왜 절망하십니까?

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십니까?

아침이 되었는데 왠지 모를 우울함과 불안함이 몰려옵니까?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자신을 보지 말고, 상황을 보지 말고, 세상을 보지 말고,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끌어 마른 뼈다귀로 가득한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마른 뼈입니다. 죽음입니다. 희망 없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죽음의 현장에서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그것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마른 뼈다귀에 힘줄이 생기고, 살과 근육이 붙고 마침내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죽어 슬피 울며 장례를 치르러 나오는 나인성 과부가 있었습니다.

누가봐도 명백히 죽음, 슬픔, 탄식, 희망없음, 고통이 가득한 자리입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부활이요, 찬송이요,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시편 저자는 낙망하면 할수록, 불안하면 할수록 더욱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나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모른 체 잠만 주무시고 계십니다.

마치 나의 상황과 환경을 외면하는 듯 보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주님을 깨웁니다.

답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주님이 일어나시자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답은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살길은 하늘에 있습니다

사방 팔방이 다 막혀 있어도 우리에게는 하늘로 뚫려 있는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절망 가운데 오히려 소망합니다.

어두운 환경에서 빛을 봅니다.

순교하는 자리에서 찬송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낙망하고 절망하던 환경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가면 죽을 줄 알았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나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 염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우울함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마음을 모아 예배에 집중하시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ikEFSO5RU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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