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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3. 2020

에스겔의 트라우마

트라우마란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죽음, 심각한 질병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신체에 위협이 되는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후 겪는 심리적 상처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트라우마란 큰 정신적 충격을 준 사건 때문에 겪는 심리적 상처입니다.


트라우마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연구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기억이 평생 가지 않을까요? 사실 현대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전쟁은 근접적인 별로 없습니다. 총을 쏴도 천미터 이상에서 혹은 비행기로 폭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간혹 눈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 그건 끔찍한 기억, 즉 트라우마가 됩니다. 

총이 발명되기 전에는 칼과 창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죽음이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팔이 잘려나가고, 내장이 터지고, 머리가 잘려 뒹구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전 공포 영화를 정말 싫어합니다. 너무 잔인해서요. 영화도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그걸 목격했다면 평생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소리와 피비린내가 떠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트라우마는 느닷없이 떠오르는 증상 그걸 플래시백(flash-backs)이라고 하는 데 이런 현상이 아주 생생하게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삶이 정말 팍팍해지지요. 그 증상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아주 과격해지거나, 괴팍해지거나, 숨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트라우마는 끔찍한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그의 등 뒤에는 언제나 죽음의 어둔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현상을 말합니다. 


에스겔은 597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을 때 포로가 되었습니다. 글로 쓰면 아주 간단하지만, 여러분이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성경이 완전히 다르게 읽혀질 것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할 함락될 때 상황이 어떠했을까요?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고, 그냥 이스라엘이 순순히 항복을 선언했을까요? 고대 전쟁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하면 그 당시 전투가 얼마나 참혹한지는 알게 될 것입니다.


성은 불타고,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앞집 아줌마, 옆집 아저씨, 뒷집의 새색시와 갓난아기도 바벨론의 군사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창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고, 칼에 베인 팔 다리가 여기저기 나뒹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피비린내로 진동하였습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감정 없이 읽을 때가 참 많습니다. 이러면 안되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벨론이 포위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뜨겁게 기도했을까요? 아무리 믿음 없는 사람도 그런 위기 상황에선 저절로 기도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예루살렘엔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에 결코 망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다 깨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불타고, 성전은 바벨론 군사에 의해 짓밟혔고, 성전 기물은 약탈당했습니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지금까지 안전하다고 믿었는데 그건 거짓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그 현장에 있었다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그 현장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면,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통곡하며 울부짖었을까요? 아마 하도 기가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정신줄 놓지 않았을까요? 미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사독 계열 대제사장 출신인 에스겔은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살아남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위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축복도 행복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포로가 되어 수천 리 떨어진 바베론에 끌려갔습니다. 마차 타고 끌려 간 것이 아니라 맨발로 끌려가습니다. 저는 에스겔이 꿈을 꿀 때마다 울부짖는 소리, 신음소리, 살려달라고 외치던 백성의 소리를 들었을 것 같습니다. 눈만 감으면 예루살렘이 불타는 장면이 보였을 것 같습니다.


그건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선지자니까 감정도 없고, 실망도 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승리했을 거라구요? 전 에스겔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도 우리처럼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하고, 괴로운 일에 괴로워하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지 일 년 쯤 되었을까? 에스겔의 부인이 죽었습니다(겔24:18). 그런데 에스겔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은 부인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부인을 사랑하지 않아서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에스겔이 부인을 사랑했다고 하였습니다.(겔24:16) 그럼 왜 그랬을까요? 제가 몇몇 주석을 읽으면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다행스럽게도 몇몇 성경학자는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에스겔을 해석했습니다. 발터 침멀리(Walter Zimmerli)는 에스겔이 겪은 고통은 평범한 인간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비극적인 사건으로서 그 고통의 심각성 때문에 아내의 죽음에 애도조차 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건 에스겔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혀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집단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았지만 산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끌어 안고 있는 삶입니다. 한남대 양인철 교수는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에스겔서를 재해석하였습니다.


트라우마는 삶과 죽음이 마구 교차하는 중간지대입니다. 트라우마 증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모두가 살인과 폭력과 파괴 현장을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끔찍한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무조건 믿음으로 승리하라! 생명은 죽음을 이기었다! 부활이다! 교리주의자들은 아무런 감정없이 그렇게 외칠지 모르지만, 그건 삶의 현장에 뒤엉켜 있는 삶과 죽음의 그림자와 고통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 PTSD)를 치료하는 방법은 뚜렷이 없습니다. 다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자기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때로 울고, 때로 웃으면서 조금씩 치료를 경험합니다. 저는 에스겔서를 비롯해서 바벨론 포로 때 쓰였던 성경들이 바로 이런 트라우마 증상을 치료하는 놀라운 방법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증언입니다. 살아남은 상황을 증언하고, 자신이 목격한 참혹한 죽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증언하면서 그러한 잔혹 행위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에스겔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참혹한 현장을 그대로 증언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당했던 어이없는 현실,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고 눈물도 나오지 않는 현실,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져버린 사람들 그런 부정적인 상황을 아주 적나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쓰인 열왕기서는 그들의 역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서와 역사서는 이런 부정 뒤에 하나님의 긍정을 숨겨 놓았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걸 해석하여야 합니다. 부정과 긍정, 죽음과 삶, 비참함과 소망함 이것들이 트위스트처럼 꼬여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인간의 현실을 보면 비참하지만, 그 안에서 조용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면 소망이 생깁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모습도 봅니다. 그건 짧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트라우마의 고통을 평생 안고 살면서 깨달는 진리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도 십자가가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트라우마를 오히려 간증하였습니다. 아주 적나라하게 간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았던 고통, 괴로움, 눈물, 순교 소식들을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증인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고난과 죽음과 고통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부활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쳤으며 그 모든 과정을 증언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고통과 아픔이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죽음과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활은 정말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https://youtu.be/fA05Iaa0a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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