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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29. 2020

세상을 두려워하는 교회

요즘 한국 사회를 가장 시끄럽게 하는 것은 펜데믹도 아니고, 정치싸움도 아니고, 기독교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에서 온갖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건 어떤 특정인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김빠진 사이다가 되었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길에 버려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우리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걸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소경 하나를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신 후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지금 이 사람 눈이 보이는 것입니까? 안 보이는 것입니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치료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지고, 죽은 자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치료에 실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매우 이상합니다.

치료가 된 것도 아니고 안 된 것도 아니고 아주 애매모호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십니다.

그러자 비로소 그의 눈이 밝혀져 만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갑자기 떨어져서일까요?

아닙니다. 이 사건의 교훈은 앞 사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 단락에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쭉 설명하시면서 21절 말씀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책망하시고 이 사건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이 사건을 이처럼 나열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기적도 경험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이 깨달은 것 같기도 하고 못 깨달은 것 같기도 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워 치유 기적을 통해서 그들의 상태를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본문 제일 앞으로 가서 어떤 사건이 있었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4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 직후에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바리새인이라는 말을 듣고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십니까?

경건, 율법주의, 선생, 위선, 외식, 교만 뭐 이런 단어들입니다.

헤롯의 누룩은 무엇이 있을까요?

힘, 폭력, 무력, 억압, 약탈, 부정, 부패, 돈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과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갑자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을 경고하셨을까요?


누룩은 빵을 부풀리기 위한 아주 작은 효소입니다.

작은 것이 결국은 온 빵을 부풀리게 하듯, 바리새인의 누룩이나 헤롯의 누룩은 엄청나게 부풀어 몹시 나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 같아서 얕보고 그냥 넘어가지만 결국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모습에서 바리새인의 모습, 헤롯의 모습이 누룩처럼 살짝 엿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4천 명입니다.

지금도 4천명 교회라 하면 대형교회입니다.

예수님 당시 4천 명이 모였다 하면 그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신이 났을 것입니다.

어깨가 으쓱거렸을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오고, 돈도 들어오고, 교회 건물도 으리뻑쩍하게 짓고, 교회 온갖 편의시설에 주차장까지 겸비합니다.

한국에서 목사고 평신도고 간에 자기가 어느 교회 사역자이고, 어느 교회 장로, 집사인 것을 은연중 뻐기고 자랑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성장시키는 목사님이라면 일반적으론 훌륭한 목사님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서 바리새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을 보았습니다.

그건 조심해야 한다. 그건 빼야 한다.


초대교회는 약한 교회였습니다.

당시 교회 건물에 많이 모여도 20명 이상 모일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매 주일 모일 수도 없었습니다.

언제 체포될지, 언제 사자와 곰의 먹이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힘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면서 예수 믿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힘이었습니다.

소리내어 전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다민족 사회, 다문화 사회, 다종교 사회였습니다.

기독교는 가장 약하고 천대받고 멸시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때 기독교가 가졌던 마음이 무엇이었을까요?

복수심!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승부욕. 그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죄 많은 세상, 다문화, 다종교, 다민족 사회에서 예수 믿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돈보다 하나님 말씀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귀한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이 기죽지 않았던 것은 힘이나 돈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다문화 사회 괜찮아요.

다종교 사회 괜찮아요

다민족 사회 괜찮아요.

포스트모더니즘 괜찮아요.

그래서 그게 뭐 어때서요.

그들은 그딴 거 하나도 신경 안 썼습니다.

그들이 가장 신경 쓴 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나타냄으로 세상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세상에서도 복음 들고 버텨내고 살아내고 승리하였습니다.

인도, 아프리카, 이슬람, 공산권, 아무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그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던 기독교에 힘이 생기고 무력이 생기고 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때 부터 기독교는 세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죄가 있고, 불순물이 있고, 타종교, 다문화가 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들어오면 … 포비아라고 하면서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보통 두려워하는 사람이 폭력적입니다.

개가 짖는 이유가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폭력적이 되고, 강압적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 무릎 꿇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마음으로는 어떤 생각을 해도 좋으니 그냥 무릎 꿇어!


그때 강조된 교리가 무엇일까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안 믿으면 다 지옥가!

이게 기독교입니까?

이게 믿음입니까?

이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입니까?

이건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정말 어중되고 얼치기 신앙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구원론 하나에 완전히 함몰된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는 결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요.

그들은 다문화 사회면 어때? 다종교 사회는 어때, 기독교가 1%도 안 되면 어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힘을 믿었고, 예수의 힘을 믿었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아름다운 삶, 사랑이 넘치고 환대가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세상이 썩었으면 썩었을수록 소금이 제 역할을 하는 법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구원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기독교는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습니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아주 오래전 서양이 기독교 국가였을 때 만들어졌던 교리를 그대로 직수입해서 마치 한국이 기독교 국가인양 착각하며 신앙생활 하려고 합니다.

그때 사용했던 힘의 방법과 논리를 그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돈의 힘, 세상의 힘, 정치의 힘, 건물의 힘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예수를 부여잡고, 말씀을 부여잡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했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핍박받을 때 비로소 정신 차리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다시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기독교가 다시 부흥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Y_afNJe26U&t=2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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