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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01. 2020

교회란 무엇인가?

초대 교회는 수천 년에 걸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전통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들은 이미 구약 성경이 있었고, 구약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신약 성경 중 제일 처음 쓰인 성경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대략 주후 50년경에 쓰였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이 쓰이기 적어도 15년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20년 이상 구약성경만 가지고 복음을 증거했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신약성경이 제대로 쓰이기 전까지 그들은 언제나 구약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릴 때마다 읽었던 성경은 구약 성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여호와 신앙의 바탕 위에 분명한 텍스트(성경)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해석되었지만, 어쨌든 구약 성경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초대교회는 아직 뚜렷한 조직체계를 갖추지  못했지만, 분명한 가르침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대교회는 중대한 국면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방인을 교회에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이방인이 유대인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도 유대의 전통을 따라 이방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욥바에서 로마인이었던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건 명백히 전통을 어긴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전통을 깰 수밖에 없었던 근거로 ‘성령’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행10:44-47)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과 율법과 믿음에 대해 논쟁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2-3)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으로 성령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임재입니다.


교회를 이야기할 때 가톨릭은 ‘조직과 구조’에 강조점을 두고 개신교는 ‘가르침’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성령’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요 1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합니다. 성령님이 성경의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인도 하심에 민감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수천 년 전통을 무너뜨리고,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성경을 재해석했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늘날 바울의 후예들인 우리는 성령에 대한 질문보다 “너희는 우리가 가르친 대로 믿었느냐?”라고 묻는가 “너희가 우리 교단에 속했느냐?”고 묻습니다.

이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우리는 가르침(교리, 신조)에 목숨을 겁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 하심보다 가르침에 더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리는 언제나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생성되었습니다.

그 시대를 이해하고, 그 시대에 복음을 잘 설명하기 위하여 체계를 잡은 것이 교리입니다.

그것은 교리의 변화, 교리의 발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틀에 불과합니다.

교리가 중요하지만, 교리만큼 아니 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쓰셨고 성경을 가르치는 성령의 인도 하심입니다.


교회는 구속사역을 전하는(가르치는) 전달자에 불과하면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 은혜를 몸소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구원 이야기의 일부여야 합니다.

그저 십자가 구속의 도리를 믿는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실제로 구원 사역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고착된 지식이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삶으로 옮겨져야 하는데 그때 언제나 성령의 역사 하심이 필요합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론에서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이루신 일에만 결정적 위치를 부여한다면(이것도 물론 필수적이다), 그분의 주되심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그와 더불어 그분을 오늘날 성령을 통해 구원 사역을 계속하시는 살아 계신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 계신 성령이 친히 그리스도의 것들을 취하셔서 보여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알 수 없다.


교회는 메시지를 충실히 전한 덕택에 혹은 사도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친교를 나눈 덕택에 생명을 유지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살아 있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동정녀 마리아의 육신을 취하신 것은 성령에 의해 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새로운 몸을 가지시게 된 것도 성령에 의해서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를 그 몸에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없이 행한 모든 일은 교회의 모양은 있으나 그 생명이 없는 모조품, 곧 텅 빈 강정과 같다.”


물론 레슬리 뉴비긴은 극단적으로 성령을 강조하는 자들을 경계하였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성경과 성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사실상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언제나 성경과 함께 사역한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종교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씀만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성령을 도외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을 깨우치게 하는 성령님 대신 자기 머리를 의지하고,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성화의 삶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려 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할 공동체와 조직이 인간이 만든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려 하는 자들입니다.

솔직히 오늘 한국 교회가 위의 두가지 모습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과 메시지를 분리하는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성령은 성경의 메시지를 우리의 삶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교회가 성령에 순종해야 하고, 성령에 민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장로교가 전하는 메시지가 메시지 그 자체만 놓고 볼 때 몇 점이나 맞을지 모르지만, 삶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빵점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지 폭스의 말로 도전하고자 합니다.

“성경을 탄생시킨 성령께 오지 않고 성경과 무슨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당신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고, 사도들은 저렇게 말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라고 말하면 당신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https://www.youtube.com/watch?v=79D2HkKnXRo&t=1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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